암 투병 일흔다섯 일본 할머니 "전 세계 최고봉 또 오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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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암 투병 중에도 후쿠시마 피난민을 위해 트레킹 캠프를 가는 다베이 준코 여사. 암에 걸린 75세 할머니에게는 꿈이 있다. 세상 모든 나라의 최고봉에 오르는 것. 현재 67개 나라 최고봉을 올랐다. [사진작가 김진석]

그는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다짜고짜 키와 몸무게를 묻자 “152㎝에 50㎏”이라며 웃었다. 몸은 왜소하지만 손은 두툼했다. “손발이 다 커요. 발은 240㎜예요.” 시원스레 말하는 일흔다섯 살 할머니의 얼굴에는 구김살이 없었다. 눈동자가 맑았고 피부는 깨끗했다. 스스로 암 투병 중이라고 밝히기 전까지 그는 영락없이 고운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다베이 준코(田部井淳子). 1975년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를 등정한 산악인이다. 그때 그는 세 살 딸을 둔 엄마였다. 92년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정했을 때는 53세였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여성으로 불리는 그를 지난 15일 제주도에서 만났다.

후쿠시마서 트레킹 캠프 ‘함께 힐링’

 - 한국에 여러 번 왔다고 들었다.

 “이번이 6번째다. 작년엔 서명숙 이사장과 제주올레를 걷기도 했다. 한라산은 2번 올랐고, 월출산·북한산도 갔다 왔다. 이태 전 한라산을 오를 때는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암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 암에 걸린 줄 몰랐다. 완치는 됐나.

 “복막암에 걸려 2012년 수술을 받았다. 완치된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약도 안 먹고 있다. 병은 걸렸어도 병자가 되기는 싫다.”

 - 병자가 되기는 싫다?

 “내가 아파서 괴로운 걸 다른 사람이 아는 게 싫었다. 그래서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걸을 수 있을 때 걸어다니면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 싶다.”

 - 그래도 무리 아닌가.

 “아직도 할 일이 많다. 92년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등정했을 때 누가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 엉겁결에 ‘세상 모든 나라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오르고 싶다’고 답한 적이 있다. 그 말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현재 67개 나라 최고봉을 올랐다. 지난 정초에는 니카라과를 갔다 왔다. 올해는 요르단·크로아티아·동티모르를 갈 계획이다.”

 - 원전 사고가 난 후쿠시마(福島)현 출신이다.

 “내 고향 미하루마찌(田村郡三春)는 사고지점에서 100㎞쯤 떨어져 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원전 피난민이 내 고향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다. 처음엔 300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1200명 정도 된다. 피난민을 대상으로 트레킹 캠프를 열고 있다.”

 - 트레킹 캠프에 대해 더 말해 달라.

 “낯선 마을에서 피난민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같이 산에 가자고 했다. 2011년 6월 처음 산을 올랐고, 지금까지 모두 33번 산을 갔다 왔다. 맨 처음 산에 데리고 갔을 때 피난민이 ‘큰 소리를 낼 수 있다’며 좋아했다. 집단생활을 하고 있어 서로 눈치보고 살았던 거다. 피난민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걸 지켜보며 자연의 힘을 새삼 느꼈다. 특히 청소년이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청소년 캠프를 따로 열어 후지산을 2번 올랐다. 모두 134명이 올랐는데 1000명은 채우고 싶다. 경비는 내가 기업에 부탁해 기부를 받는다. 개인 후원자도 있다.”

 - 트레킹 캠프 기간과 투병기간이 겹친다.

 “그래도 트레킹 캠프를 빠진 적은 없다. 피난민에게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처음 후지산 가는 날이 수술받고 퇴원한 이튿날이었다. 함께 산을 올랐지만 정상은 밟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제주 ‘국제 트레일 행사’ 놀라워

 - 진심으로 묻는다. 정말 몸이 괜찮은가.

 “나는 산보다 도시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지붕 있는 곳에서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없다. 바람 느끼고 나무 바라보며 살고 싶다. 수술 뒤로 손발이 자주 저리다. 혼자 지퍼를 못 올릴 때가 있다. 그러면 남편(73)이 도와준다. 남편과 늘 같이 다닌다.”

 다베이 여사는 15일 개막, 17일까지 열리는 제4회 월드트레일즈콘퍼런스(World Trails Conference·WTC)에 강연자로 초청돼 지난 14일 방한했다. WTC는 세계 유일의 국제 트레일 행사로 ㈔제주올레가 주관한다. 올해는 18개국 50개 트레일(걷기여행길)의 기관과 단체가 참석했다. 다베이 여사는 “내가 일본트레킹협회 2대 회장 출신”이라며 “일본에선 지역간 협력이 전부인데 한국이 이런 규모의 국제 행사를 주최해 놀랐다”고 소감을 밝혔다. 다베이 여사 강연은 17일 오후 3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

제주=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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