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카 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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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 주간 시사지「타임」은 신년 첫 호에서 『73년의 인물』로 「존·J·시리카」판사를 선정했다. 그는 69세의 「워싱턴」DC 지법판사. 「타임」지에 따르면 세 명의 경쟁자가 더 있었다. 「이집트」의 「사다트」대통령,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왕,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 73년의, 세계 지축을 흔든 이들 기라성 같은 거물들을 제쳐놓고 일개 판사를 「인물」로 뽑은 것은 새삼 깊은 감명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정의의 실현』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미 국민의 갈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시리카」는 「워터게이트」사건을 다룬 판사이다. 이른바 『7인의 도둑』이라는 백악관의 요인들에게 무사히 소환장을 내고 수사를 진전시킨 것은 바로 「시리카」판사였다. 그는 또 백악관의 도청「테이프」를 법원의 증거물로 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이것은 곧 미국 대통령의 직권에 어떤 한계를 제시하는 사법권 수호의 한 상위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한마디로 『대통령은 법의 위에 있지 않다』는 명쾌한 판결을 내리는데 기여했다. 그것은 국민은 「정치」에 앞서 정의를 더 존중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일깨워 주었다.
「시리카」는 「이탈리아」의 이민인 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조그만 식료품 가게를 차려 놓고 있었다. 그러나 병약한 아버지 때문에 그들 가족은 기후가 좋은 곳을 찾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가난, 가난, 가난과 싸우는 생활이었다』고「시리카」는 지금도 그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가난은 때로는 입지전적 인물을 만들어낸다. 「시리카」는 소년시절을 신문팔이와 자동차정비공 생활을 하며 보냈다. 그래도 공부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컬럼비아」예비 학교를 나와 「조지·워싱턴」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시리카」는 강의시간엔 『무슨 말을 떠드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학을 그만두고 말았다. 다시 신문팔이를 했다.
그렇다고 나날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렇게 내 생애는 끝장날 것 같았다』고 그는 당시를 술회하고 있다. 법과 대학에 재입학 했다. 그리고 학비는 월 1백「달러」를 받고 체육관에서 일하는 것으로 충당했다. 권투선수들의 「스파링」상대가 되어 얻어맞아 주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어머니는 「스파링·파트너」생활을 집어치우도록 했다.
「시리카」는 「워싱턴」으로 갔다. 법조인으로서의 연륜을 쌓을 셈으로 가난한 피고들을 위한 무료 변호인 생활을 자청했다. 이것이 오늘날 그의 입지를 성취시켜준 시작이었다.
『나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 단순히 그것 때문에 특별히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시리카」판사의 말이다. 미국의 가능성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소신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데 있는 것 같다. 모든 나라가 부러워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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