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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제자 정구영>제34화 조선변호사회(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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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수교 졸업 직후>
3·1만세사건으로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계속 정국이 소란하자 당시 전수학교 당국은 3월3일부터 실시키로 예정했던 졸업 시험을 늦추고 미루다가 나중에는 이를 포기하고 그대로 졸업증서를 찾아가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첫날 경찰에 연행된 5명의 학생들은 물론 나머지 학생들도「일본인이 주는 졸업장이 필요없다」고 모두 학교에 등교치 않자 그해 5월초부터 선생들이 졸업반 학생을 개별 방문하여 애원하다시피 졸업증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네가 졸업증서를 받은 것은 그해 8월4일로 바로 전날 저녁 학교장인 오손자 박사가 내 집으로 직접 찾아와 간곡한 귄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오손자 교장은『너희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일본인인 나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사제간의 의리조차 끊을 수 있느냐, 아무리 이민족이라 해도 그것은 없앨 수 없다』며 눈물겨운 권고를 했다. 나는 그의 말에 감복되어 이튿날 등교해 44명의 동급생 중 재판에 회부된 5명을 제의하고는 마지막으로 졸업증서를 받았다.
이에 앞서 학교의 알선으로 나는 당시 삼정물산 경성지점에 75원의 초봉으로 입사키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김세완(전 대법관·지난 3월 교통사고로 사망)도 당시 일본의 신흥재벌인 영목상점 직원으로(초봉60원) 일하기로 얼추 말이 오고갔었다.
당시 전수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졸업을 하면 재판소 서기로 취직해 사법관 시보의 근무기간에 해당되는 1년6개월을 일하면 조선총독부 판검사 채용 시험에 응할 자격을 얻곤 했었다. 그것은 학교 성적이 중간 이상이면 대부분 그 기간을 거쳐 판검사로 합격되는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해는 제l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전시중의 호경기가 후퇴하여 경제공황이 일어나는 조짐이 있는 때로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인 경제 공황을 우려하던 때였으나 우선「눈앞의 떡」이라고 초봉 20원의 재판소 서기보다는 대회사의 사원으로 취직하는 것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삼정이나 영목 등 일류회사가 특별히 학교에 요청하여 성적순대로 나와 김세완을 뽑기로 결정했을 때 모두들 부러워하는 눈치였었다.
오손자 박사가 내집에 와서 졸업증서 이야기를 할 때 내 취직문제 대해서도 오랫동안 의견을 나눴는데 오손자 박사는 한마디로 삼정을 물리치고 재판상 서기직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오손자 박사는『삼정회사 취직이 당장은 좋을듯하나 중견사원이 되고 간부가 되려면 조선사람에게는 여간 불리한 것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재판소 서기를 거쳐 빠른 기간내에 시험에 합격하면 사회적지위도, 변호사 자격도 얻을 수 있다며 자신이 총독부에 특별히 알선해 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약속했고 나흘 뒤인 8월8일자로 경성지방법원 민사부 서기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일은 일반 서기의 본연의 사무 이의에 재판기록을 열람하거나 판사들의 판결서 작성 등을 돕는 일이 있는데 조선인 서기들로는 나 이의에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서광설(납북) 이인(현 서울 거주)과 특수학교출신의 서기홍(뒤에 변호사·작고)이화종(작고·변호사)등이 있었다.
그때는「3·1만세 사건」이라는 거센 흐름의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때여서 일본인들, 특히 관공서의 간부급들은 조선인 관리들의 움직임에 지나치다 할 정도로 신경과민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터에 경성지방법원판사 채용묵과 전매국 부사무관직에 있던 김기선(일본대학출신으로 현 민관식 문교부장관의 장인)이 중심이 되어「조선인 관리에 대한 차별대우 폐지에 관한 탄원서를 제출하려하자 각급 기관은 아연 긴장했다.
당시 채용묵과 김기선은 경성에 있는 각 관청의 조선인 관리 대표들을 모아 탄원서 문안작성을 하는 등 의견을 나눴는데 경성지방법원 조선인대표는 판사로 있던 채용묵이었다.
이들은 판검사시험에 합격한 조선인의 초봉이 1백원인데 반해 일본인은 1백33원33전에 그 액수의 40% 해당되는 가봉이 있고, 사택료라 해서 별도로 50원을 지급하는 등 조선인의 곱절이상을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이러자 각급 기관장들은 자기휘하의 조선인관리들을 회유 또는 설득하는데 안간힘을 썼는데 경성지방법원장 칙사 하원건지조는 거의 매일 조선인 직원들을 자기방에 모아놓고 변명을 늘어놓곤 했다.
나와 서광설 등이 경성지방법원 서기과에 있던 1920년 여름 기미독립운동사건의 33인에 대한 공판이 열렸고 뒷날 법조계에 널리 알려진 공소부수리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다.
그러던 21년6월 서울에서는 조선총독부 관·검사 채용시험이 있었다. 그때 자격은 앞서도 말했듯 일본의 각 대학 법과를 졸업했거나 경성전수학교 졸업생으로 1년6개월 이상 법원 서기과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자라야 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법정기간인 1년6개월에서 한달 남짓 모자라 다음해에나 응시하려고 아무런 준비도 안했는데 시험을 며칠 앞두고 총독부 법무국에서 나를 지명해 특별자격을 부여한다는 공문이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도깨비공부를 하여 시험을 치렀고 수석으로 합격하여 그해 8월에 나는 대구지방법원의 검사가 됐다.
당시 초봉이 1백원, 쌀 한가마니에 2원70, 80전하던 때이니 그것은 상당한 금액이었다.<계속>【정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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