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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애환|제6화 가장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한(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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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가등청정의 사람됨이 오늘날 비후본묘사에서 추켜 올리고 있는 것처럼 결코 덕장일 수 없었다는 것은 일본 측의 여러 사료에 더욱 뚜렷이 나타나 있다.
우선 풍신수길의 엉뚱한 「조선정벌」주장에 맨 먼저 맞장구를 친 장수는 청정 한 사람 뿐 이었다는 사실부터가 그렇다. 당시 수길의 막하에는 덕천가강·모리휘원·전전이가 등 쟁쟁한 장수들이 운집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출내기나 다름없던 청정이 주전론을 들고나와 수길의 과대망상증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모든 사람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음이 틀림없다.
이때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화산소검(살마번주 도진공의 중신) 은 일기에다 이런 글을 남겼다.
『청정이란 자는 아마도 대합 전하(수길) 가 약속한 <대당을 정복한 자에겐 그 땅 20개국을 배령케 하리라> 는 말에 혹했었는지도 모른다』고(『화산소검 일기』).
특히, 조선의 두 왕자를 사로잡게 된 경위를 기록한 일본의 여러 사료들은 청정의 저돌적 행동을 가리켜 단적으로 『미치광이 짓』이라고 비웃고 있다.
-<가등 군은 안성에서 우군들을 떼어놓고 단독으로 북상, 6월18일(임진년·선조 25년·1592년) 안변에 도착했다. 이때 마을 장로들은 청정에 항복한다는 뜻으로 우마 20여 필을 바치면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달 초 8일에 조선의 두 왕자가 여길 통과, 북쪽으로 향했는데, 그 증거로 그때 왕자를 모셨던 종신 박충간이 거리에 써 붙이고 간 근왕병 모집의 방이 여기 있다고 실물을 가져왔다.
그러자 청정군의 막료인 과도직무는 『이건 필시 적의 모략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원로 깊은 산골짜기에 유인해서 맹타를 가하려는 계략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부하 장병들은 경(서울)을 떠난 지 벌써 16일, 흑서를 무릅쓰고 주야겸행의 강행군을 시켰기 때문에 인마가 모두 피로해 있소. 다행히 이 고장에는 쌀과 콩 등 식량도 풍부하니 여기서 잠시 쉬었다 서울로 차사하고, 그 기별에 따라 되도록이면 서울로 돌아감이 좋겠소…』하고 청정을 만류했었다.

<지방 관속 매수 이용>
그런데도 청정은 그 따위 소리를 하려면 혼자 남으라고 내뱉고, 직속의 9천 여기를 이끌고 『산돼지처럼』북진을 계속할 것을 명했다. 『미치광이 같은 사람』과 합속해서 별 아니꼬운 말을 다 듣게 됐구나 싶다…>(대관정호 저 『조선 정벌기』중에 인용된 『고려진 일기』의 한 구절).
가등청정은 이렇게 독불장군, 저만이 전공을 독차지하려는 공명심에 날뛰던 장수였지만, 그 당시 조선의 변경 민심이 조정에서 크게 이탈하고 있음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강원도·함경도에 들어가서는 부하 장병들의 난폭한 행동을 엄금하고 조선 지방관속들을 금품으로 매수하는 등 간사한 전략을 썼다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함경도 전 감사 유영립은 일본군을 피해 백운산 상중에 숨어 있었는데 그 고장 농민들이 우리(왜병)를 인도해서 그를 생포할 수 있었다….
-함경남 병사 이혼은 갑산의 어느 암굴 속에 숨어 있었는데, 농민들이 그 목을 베어 우리(청정)의 군문에 바쳤다….

<거칠고 간사한 무장>
-회령 부사 국경인은 본래 전주 사람인데, 이곳에는 귀양살이로 쫓겨와 나날을 불만 속에 보내던 자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우리(청정 군)의 북진은 조선 조정에 대한 절호의 보복의 기회를 준 셈이다. 국경인은 부하 일당을 꾀어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5백 여기를 거느리고 성내를 제압했다. 그리고서는 먼저 남병사 이영, 회령 부사 문학헌 등 수십 명을 붙잡아 포박하고, 이어 임해군·순화군 등 두 왕자, 그리고 그 부인·시녀·재신 김귀영 등을 묶어, 이들을 인질로 삼아 장군(청정)께 항복할 뜻을 전해왔다. 7월23일, 청정은 국경인의 청을 받아들여, 불과 10여기의 병력으로 회령 부에 입성하고 두 왕자 이하 2백여 명의 신병을 인도 받았는데, 그는 손수 왕자의 오랏줄을 풀고 호위병을 대동시켜 진으로 돌아왔다….(원전종순 저 『조선 の 역』중에 인용된 『고려진서』에서)
일본 측 사료에는 청정의 인품에 관하여 그밖에도 많은 비판적인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그는 너무도 공명심이 강해 동료 장수들을 모함하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 그리고 조선서는 무구한 백성들까지 무차별 살생을 일삼았는가 하면, 죽은 자의 코와 귀를 베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소금절이를 만든 사실 등 오히려 일본 측의 기록에 더 호된 비판이 실려있다. 위에서 인용한 하천 병대부의 『고려진일기』와 화산소검의 『일기』말고서도 천형의 『서정일기』, 「크라세」의 『일본서교사』등에 묘사된 청정의 인물평은 대체로 거칠고, 간사한 무장으로서의 면목만이 「클로스 업」되고 있다.

<사람 부리는 재간 비범>
그러나 한편 그에게는 재빨리 기를 보아 서슴없이 행동에 옮기는 기민성과 타국인이라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기술이 있는 자는 파격적인 대우로 그를 이용할 줄 아는 천재적 재간을 가진 장수였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앞서 인용한 일요상인의 편지 사연 속에 조선 각처에서 볼모로 잡혀 온 선비의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것인데 청정은 임진·정유 난에 출진하자 특히 조선 사람들의 성 쌓는 기술에 감복하고 다수의 축성 기술자들을 포로로 데려와 자신의 거성을 개축하는데 동원시켰다.
오늘날도, 일본 3대 명성의 하나로 손꼽히는 태본성은 임진·정서난 때 한국에서 데려온 기술자들을 동원, 경장 12년(1607년)에 완성한 것이다. 그는 조선 출병의 첫 상륙지인 부산 진에서 그 성곽의 절묘함에 감탄, 전후 7년 동안의 전란 중 기회만 있으면 조선인 축성 기술자를 생포하여 일본에 데려가는데 배려를 잊지 않았었다.
어쨌든, 이 같은 장수에게 사로잡힌 한국 소년 여대남이 그 청정을 모신 비후본묘사의 3대조가 되어 후세에까지 야릇한 감회를 느끼게 하는 친필 서한을 남겼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일요상인의 인간적 고민>
학덕 높은 고승으로 이름을 날렸을 망정,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는 공포감이 도사려 있었고, 고향 땅 부모 곁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날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던 인간 일요상인의 심경을 살펴볼 때, 역사는 다시금 전쟁의 잔인성을 경고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부모님 곁에 돌아갈 기회를 얻어, 다시 부모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고 부모님이 지어주시는 의복을 입을 수 있고,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오랜 회포를 풀 수만 있다면…』하고 하소연한 일요상인의 외침을 결코 값싼 「센티멘털리즘」의 소치로만 돌려버릴 수는 없다. 그의 글은 일본 속에 맺힌 수많은 한인들의, 수많은 원한들을 증언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요컨대 후세의 모든 사람들에게 독재자가 일으킨 전쟁의 잔인성에 관하여 많은 역사적 교훈을 일러주는 교과서로 보아야할 것이다. <차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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