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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의 폭풍에 굴복한 「닉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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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닉슨」처럼 그 거동을 줄잡을 수 없는 사람도 드물다고 내노라 하는 「닉슨」 전문가들이 비명을 지른다.
소련과의 타협, 중공과의 화해, 적자 예산, 소득정책,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콕스」검사의 파면, 문제의 녹음「테이프」제출 동의 같은 것이 『「닉슨」 변덕의 대표작』 들이다.
사정이 이쯤 되면 「닉슨」에 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닉슨」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사실뿐이다.
「닉슨」이 들어앉은 백악관은「캘리포니아」의 그의 출생지 「오린지」군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이 동부 지식인들의 자유주의를 경계하고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행동원칙으로 지켜지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일관성 없어 보이는 「닉슨」의 속에는 몇 가지 『불변적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궁지에 몰렸을 때는 언제나 세상을 놀라게 하는 『과감하고 절박한 도박』을 벌인다는 것이다. 그런 때 「닉슨」의 행동철학은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는 것이다.
「콕스」검사의 파면사건은 위기를 극복하는 『잔재주꾼 「닉슨」(Tricky Dick)』의 방약무쌍한 도박의 최신판에 불과하다.
「닉슨」연설에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말은 「적」이다. 밖으로는 공산주의자·월맹, 안으로는 동료지식인들의 자유주의·반전학생운동·자유주의적 언론인·노조 등이 그의 적이다.
「닉슨」이 제1의 적으로 삼은 「콕스」가 눈독을 들인 것은 문제의 녹음「테이프」만이 아니었다. 그는 백악관의 기타 「메모」」와 「테이프」까지 요구할 참이었는데 가장 「닉슨」을 긴장시킨 것은 「닉슨」이 68년 선거 후 정치헌금으로 들어온 돈을 투자회사에 투자했다는 혐의를 「콕스」가 수사할 기미를 보인 것이다.

<콕스 파면으로 다음 전략은 마련>
「콕스」파면 후 「닉슨」이 「테이프」를 내놓기로 굴복한 것은 의회의 탄핵 움직임·반「닉슨」시위·여론의 폭풍이 큰 원인이지만 일단 「닉슨」은 「콕스」제거 특조위 해체의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하여 다음 단계의 전략을 마련할 시간을 벌었다. 「콕스」파면을 오류이라고 판단한 것은 일이 벌어지고 난 뒤이다.
「닉슨」은 언제나 곤경에 빠지면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반격하는 버릇이 있다.
70년초 월남 철수들을 발표한지 1주일만에 미인을 「캄보디아」에 진공시켜 반전 학생들을 혼란시켰다. 그는 철수와 침공을 동시에 실시했기 때문이다. 「닉슨」은 「크메르」진공 후 5월1일에는 반전학생들을 「놈팽이」이들이라고 불렀다. 학생들도 그의 적이었다. 「크메르」진공은 4명의 학생들을 사망케 한「켄트」주립대학사건을 몰고 왔다. 이 사건은 62년「캘리포니아」주지사 선거 낙선이래 최악의 의기소침한 상태로 몰았다. 「켄트」주립대학 사건으로 의기소침한 「닉슨」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회복하기 전에 일어나는 자학증세이다.
지난 5월9일 한밤 「닉슨」은 애견 한 마리를 데리고 백악관에서 10「블록」정도 떨어진 「링컨」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반전학우를 찾아갔다. 자신을 「링컨」버금가는 위인이라고 자처하는 「닉슨」. 「링컨」이 남북전쟁 때에 심야의 산책을 하다가 무명의 병사를 붙들고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그의 소년시절의 영웅의 행적을 흉내낸 것이다.
그때의「닉슨」은 싸움을 혐오하는 그의 어머니의 아들이었고 「콕스」 파면직후 녹음 「테이프」를 내놓기로 결심한 행동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닉슨」은 경쟁을 사랑한 그의 아버지의 아들이기도 했다.
「닉슨」은 일단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자신을 회복했다 하면 공격은 무자비하고 과감하다. 아마도 26일의 기자회견에서 그는「닉슨」 「스타일」의 공격의 포문을 열지도 모른다.
「닉슨」의 자화상은 자기가 「크게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닉슨」은 공격과 수비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법이 없다.
월남전과 「크메르」침공에서는 월맹, 「헤인즈워즈」·「카스웰」 파동에서는 의회, 「달러」 위기에서는 동맹국들과 투기가들, 녹음「테이프」사건에서는 「콕스」와 그 일당이 「악한」이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닉슨」의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것 중에 하나가 지난 8월 14일의 유명한 「워터게이트」 연설이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지는 의문>
이는 「워터게이트」」사건은 이제 법정으로 넘겨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주장하고는 「닉슨」행정부에서 성행한 정치 「스파이」와 강도 짓은 1960년 때의 민권운동과 학원소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71년8월15일 경제정책은 180도 전환하면서도 그때까지의 자신의 경제정책이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고 73년의 8월14일 「워터게이트」연설에서는 「홀드먼」과 「엘리크먼」을 『내가 만난 가장 훌륭한 공복』이라고 추켜세웠다.
「닉슨」은 「콕스」」파동을 치르고 「캠프데이비드」의 「올림퍼스」 신전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초 25일 TV연설을 할 예정이었으나 방법을 바꿔 26일 기자회견을 할 방침이다.
그가 「올림퍼스」신전에서 「고독과의 대화」를 마치고 하계로 내려와 국민들 앞에 설 때 『어떤 「닉슨」』의 모습을 보일지는 궁금하지만 예측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탄핵과 사임을 요구하는 아우성을 먼발치로 들으면서 「고독한, 그러나 과감한」결단을 마음속으로 내리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워싱턴=김영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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