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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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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5화 북해도 위령탑의 엘레지>(3)
북해도는 1년 중 거의 절반을 엄동설한에 묻혀 사는 곳이다. 북위45도6분부터 41도5분 사이를 차지한 이 땅은 우리 나라 함경북도 북단으로부터 멀리 만주와 「시베리아」의 접경 송화 강 지역에 이르는 지대와 거의 같은 위도 상에 있다.
크기로는 경기·강원도를 제외한 남한 전 면적보다도 약간 큰 7만8천5백㎢. 여기에 현재의 서울시인구와 비슷한 5백10만 여명이 살고있으니 가히 그 넓이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인적 미답의 광막한 평원과 준령들이 도처에 깔려있어 원시림 속을 몇km씩이나 뚫고 달리는 「하이웨이」위로 차를 몰다가도 별안간 굴속에서 뛰어나오는 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이다.
「삽보로」에서 이 섬의 최북단 「와까나이」(치내)에 이르는 3백60여km 철로연변에도 무수한 원시림과 활화산·호수들이 눈앞을 가로막듯 차례차례 뛰쳐나와 그 황량한 자연미에 감탄을 금치 못하나, 바로 이 연변 도처에 한인들의 피맺힌 사연이 깔려있는 것이다.

<한인 위령 시비 곧 제막>
대낮 12시20분 「삽보로」역을 떠난 급행열차가 목적지인 「하마돈베쓰」(빈돈별)의 접속 역 「오또이네쁘」(음위자부)역에 닿기까지는 9시간이 걸린다. 도중 함관 본선(함관에서 찰황 경유 욱천까지), 종곡본선(욱천에서 「나요로」[명기]까지), 천북선(명기에서 치내까지) 등 세 노선을 바꿔 타야한다.
발음하기조차 거북한 「오또이네쁘」는 태평양전쟁 중 주야겸행의 돌관 공사로 완성했었다는 「아사무야」(천모야)군용비행장과 지척의 거리에 있는 철도교차점이기도 하다.
비행장건설공사 때 죽은 수많은 한국인노무자들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1백30위의 진혼을 위해 세워졌다는 위령비가 이 고장 빈돈별정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그 현장에 가보기로 나선 길이다.
이 위령비는 3년 전인 70년6월, 이곳에 「천북산도장」이라는 불교수련장을 세운 일본인승려 각산관산 스님 손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그는 오랜 기간의 조사를 통해 한국인 순난자의 이름과 출신본적지를 낱낱이 밝혀 이 비에 새겨 놓았다.
높이 2m여의 석축기단에 <한국인 순난지령위>라 새기고, 그 위에 1m키의 석제 아미타불 님을 모셨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날개처럼 「패널」식 석비를 배열,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현장 주변에는 그가 추진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석비 건립공사가 한창이다.
위령비의 건립당시 이곳 총 영사로 재직했던 현 주일공사 송찬호씨가 관산 스님의 높은 뜻에 감동, 한편의 한시를 보냈는데 위령비 건립 3주년기념 법회(법요)를 열 때 이 시를 새긴 시비의 제막식도 함께 올리겠다는 것이라 한다.
거의 석각이 끝난 시비의 문면은-
진충순직정난추화베화낙타향몽
문세상심물세의운거공내고국사
빈돈섬멸장여단해방아동목전박
석탑유양의갱이영령응한불유시
주일대한민국공사 송찬호 근고

<농촌청소년 강제납치>
시의 운각을 제쳐놓으면 그 뜻은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조국광복이 눈앞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이곳 빈돈별의 광야에서 죽은 영령들에게 석탑을 세워 넋을 달래 노니 굽어살피소서 하는 뜻이리라.
각전관산 스님이 개산한 천북산도장에 지금도 봉안돼있는 종곡군천모야 본원사의 과거장을 보면, 『본사에서 장례를 치른 한국인 근로보국대원 희생자는 90명, 그밖에 유골을 수습하지 못한 자는 부지기수이다. 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어 후일을 위해 이를 기록해둔다』고 적혀있다. 그러니까 빈돈별의 위령탑에 봉안된 1백30위의 순난자들은 이 절의 보존문서 등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자들만으로 국한돼있다. 그 나머지 순난자들의 실수가 얼마나 되며, 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가는 오직 이곳에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산 역사의 증인들의 얘기와 그 당시의 기록들에 의해 간신히 그 편린들을 엿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한필용 옹의 입을 통해서, 전쟁 중 한국인 노무자들이 이곳에까지 끌려오게 된 경위와 이곳에서의 비참을 극한 생활상을 더듬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강제연행의 경위…각 탄광과 사업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일본정부 후생성에 청구하면 동원명령이 조선총독부에 하달된다. 총독부는 이 동원령을 각 도·시·군에 할당, 경찰이 주동이 되어 주로 농촌청소년·소녀들을 강제납치 하다시피 한 곳에 모으게 하였다. 인원에 부족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까지 마구잡이로 연행, 부산지구에 집합시켰다.
이때 부산에는 북해도 각 산업 장에서 청부를 맡은 인솔자가 대기하고 있다가 이들을 선편으로 싣고 「오다투」(소준) 또는 「무로랑」(실난)항까지 끌고 간다.
이 두 항구에 내린 한국인 노무자들은 현장에 나와있는 각 사업장대표자에게 인도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개중에는 질 나쁜 인솔자의 농간으로 엉뚱한 일터에 배정되기도 하고, 때로는 즉석에서 매춘부로 매매되었다.

<10년간 72만 명 끌려가>
▲한국인 노무자의 취업실태…1935년부터 1945년까지의 10년간, 북해도에 끌려온 한국인노무자의 총수는 약72만 명, 이중 강제 징용된 자만도 34만 명이 된다는 것은 앞서도 말한바와 같다.
이렇게 해서 끌려온 한국인 노무자는 주로 탄광과 제강소, 철도부설공사장·비행장건설공사장·「토치카」 등 군사시설공사장·발전소(댐)공사장 등에 분산, 배속되었는데 그밖에도 「아까쓰기」부대(효부대)의 군속으로 다시 징발되어 일본의 최 북방 영토 「지시마」(천도)열도 등에 끌려가 전멸한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인노무자의 노동조건…대체로 건설공사장의 단순 노역부로서 취업한 자가 대부분이나 탄광에서는 그 중에도 가장 힘겨운 갱 내부(항 내부)로서 혹사당하였다. 이들은 하루 10시간∼12시간의 중노동을 강요당하고서도 그 임금은 일본인 동종직종의 약3분의 1이었고 따라서 재해율·사망율은 그 반비례로 3배 이상에 달했다.
1944년 「유우바리」(석장) 탄광의 경우, 일본인 광부 7천1백43명(그중 갱 내부 2천4백3명)에 대해 한인광부는 6천2백85명(갱 내부5천4백3명)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평균임금은 일본인 87원70전에 대해 한인은 고작 32원30전에 불과했었다. 이리하여 한인노무자의 소모율은 3년간에 35·6%라는 놀라운 사상자를 냈던 것이다.
이들의 수용시설은 전회에서 언급한 「바락」식 「다꼬베야」가 대부분인데 30조 넓이에「다다미」를 깔거나 그냥 마룻바닥을 한 한방에 40여명씩의 노동자를 수용,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철에도 난방시설조차 제대로 안돼 있었다. 게다가 극심한 물자부족과 속검은 하청업자들의 농간까지 겹쳐 겨울용 내의는 물론, 옥외작업용 방한작업복·작업화(작업화)의 공급조차 거의 없었다.

<고통 못 참아 탈출속출>
뿐만 아니라 극심한 굶주림으로 영양실조환자가 속출, 바닷가 해초를 몰래 뜯어먹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이것마저 현장감독에게 발각되면 반 주검이 되도록 심한 매질을 당했다. 이러한 고통을 참지 못하여 탈출소동을 벌이는 자가 속출했지만, 붙잡히기만 하면 이들은 불에 단 쇠꼬창이의 화형을 당하는 일조차 예사였었다. 이렇게 해서 부상을 당하거나 노동력을 잃은 한국인 노무자들은 심한 경우(실난군수공장)산채로 구덩이 속에 생매장까지 당했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한 옹을 비롯, 현재 북해도에 살아남아 각기 모진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많은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역력히 드러난 사실들이다.
찰황의 「택시」운전사 최우수씨(41세), 실난의 고물상업 김달선씨(53세)와 이 달시의 고경덕씨·이광일씨·정임진씨 등 한인들뿐만 아니라, 이곳에 사는 일본인 영목량일낭씨(69세·당시 탄광촉탁의)·남운공치씨(50세·당시 삼능미패 광업소의 반장감독) 등에 의해서도 그 처참했던 상황이 낱낱이 고발되고 있는 것이다. <계속>
차례
「프롤로그」 심층 발굴의 의미
제1화 선묘녀의 비변과 의상대사
제1장 자랑스런 「귀화인」의 후예들
제2화 왕인 박사의 직손 아도홍문씨
제3화 고려신사 59대 궁사 고려등웅씨
제4화 살마소의 명도공 14대 심수관씨
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제5화 북해도 위령탑의 엘레지
제6화 가등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간
제7화 신진도의 성녀 「오다·줄리아」
제8화 포로학자 정희득의 우수
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행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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