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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제4화 살마소의 명도공 14대 심수관씨③|제1장 자랑스런「귀화인」의 후예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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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심수관 가를 비롯, 이조 도공들의 후예가 살고 있는「나에시로가와」를 향해 녹아도 시를 떠난「버스」는 서북으로 뚫린 국도를 달리기 약40분, 「미야마」란 조그마한 마을에 닿았다.
이곳 일대에선 심수관 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미산 정류장에서 작은 개천을 건너 서남 측으로 2㎞를 내려오면 바로 묘대천이다.
곱게「아스팔트」단장을 한 길 좌우에 작은 집들이 모여있고. 그 동네 한가운데「수관도원」이란 큼직한 간판이 있다. 간판 옆에는 우리 나라 고가 중문 그대로의 그리 크지 않은 대문이 있다.
바로 이 집이 심수관 가 일족이 대대로 살아온 본거지.
대문에 달린 문패 또한 고색 창연하다.
대대로 세습된 성명 「심수관」은 이제14대를 기록하고 있다.
작은 두 짝 대문이 오는 손님을 반기는 듯 활짝 열려 있다. 다사로운 햇볕아래 화사하게 펼쳐진 마당 이곳 저곳에 굽다버린 도자기 파편들이 널려있다.
조금도 꾸밈새가 없는 소박한 분위기에 친근감이 솟는다.

<심수관씨 부인이 환대>
왼쪽 낮은 담장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현관 문턱 앞에서 큰기침을 몇 번 한 다음에야 젊은 여인이 나왔다.
젊은 여인은 한국에서 왔다는 설명을 듣자 곧 안으로 기별해 중년부인 한 분과 함께 나왔다.
우리 나라 부잣집 맏며느리를 연상시키는 중후한 중년부인이 바로 14대 심수관씨의 부인이었다.
『마침 심수관씨는 녹아도 시내에 나가고 지금 없으니 전화로 연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미안해하면서 극진한 대접을 한다.
잠시 기다리자, 또 그녀는『심수관씨와 전화 연락이 되었으니 2시간 안에 돌아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심씨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 도공들 후예가 단군 할아버지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 옥산 신사와, 또 그들 조상들의 묘소를 돌아보기로 했다.
70여 가구의 묘대천 마을에서 지금 도자기 굽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집안은 10여 집밖에 안 된다. 그것도 거의가 소규모로 찻잔 등 잡품을 대량생산하여 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
높고 낮은 구릉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사이사이에 대나무 숲이 우거졌고, 묘대천 부락은 그 속에 숨바꼭질하듯 자리잡고있다.
하늘을 가리듯 솟은 대나무 숲은 마치 전북 남원이나 전남 담양에서 본 마을안 대나무 숲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끌려간 도공들이 3백70여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게된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고향과 너무도 닮은 이 대나무 숲을 보고 망향의 정을 달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문헌에도 나와있다.
마을을 벗어나 푸른 숲을 끼고 서북으로 올라가다 왼쪽에 옥산 신사로 가는 참도가 있다.
길옆에는 역시 신사 입구 표시인「도리이」. 황토 흙을 밟으며 길은 오른쪽으로 꺾인다.

<고향하늘 그리며 망배>
한가운데를 돌 조각으로 다듬어 놓은 반듯한 길이 하늘로라도 올라갈듯 급경사 졌다.
몽매에도 잊지 못할 고향생각에 멀리 이역 만리에서 고향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망배를 하러 오갔던 길이다. 얼마나 많은 발길이 이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고 내렸을까?
숨이 좀 가빴지만 숙연한 마음에 땀도 잊고 2백여m를 단숨에 올랐다.
언덕길을 다 오르면 별안간 펑퍼짐한 고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새싹이 돋은 파란 차밭이 눈앞을 시원하게 한다.
머리를 흰 수건으로 가린 서너 아낙네들이 차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차밭을 지나 다시 세째번 「도리이」를 거치면 옥산 신사의 사전이다.
촌사인 옥산 신사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 나라 단군을 모시고 있다.

<17성 도공들 공동묘소>
향방도 서북쪽. 남지나 해를 건너 정면으로 조국을 바라다보는 위치를 택했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남지나해 푸른 물결이 푸른 하늘 끝에 보이는 이곳에 올라와 멀리 조국과 고향산천에 두고 온 숱한 사연들을 기리고 하염없는 눈물을 씻었을 이들의 심정이 가이없이 헤아려진다. 실로 옥산 신사는 이들의 마음의 고향이요, 설음을 달래주는 안식처였던 것이다.
배전 처마 밑에는 여러 개의 봉납품이 걸려있다. 『지성통신』이란 액자에는 봉납자의 이름 또한 임경시 임경덕 임경행 등 우리 나라의 성씨 그대로이다.
또 한구석에는 작은 서양화 한 폭도 걸려 있다. 무엇이든 자신이 가진 재간과 정성을 다해 마음의 고향인 이 신사에 바친 것이리라.
묘대천을 개척한 17성의 도공들 묘소는 신사 아래 가파른 언덕을 끼고있다.
작은 능묘를 방불케 하는 심수관 가의 묘소를 비롯, 박·차·변·임·하·이·강·신씨 등 크고 작은 묘비들이 옹기종기 솟아 공동의 묘역을 이루고 있었다.
묘비를 세운 권속들의 이름 또한 우리 나라 성명이 대부분.
묘비마다 에는 바로 앞에 도자기 찻잔이 놓이고 맑은 물이 마르지 않고 깨끗이 담겨져 있다. 또한 옆에는 「아스파라거스」등 붉은 꽃이 산뜻이 꽂혀있다. 정성이 안간 묘소가 하나도 없는데 놀랄 수밖에 없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얼마나 정성 들여 선조들의 묘를 돌보는 것일까?

<선조 묘마다 도자기 비>
마침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아낙네가 주전자를 들고 묘비 앞 도자기 잔에 정성껏 물을 붓고 있었다. 이 묘비는 다른데 것과는 달러 비전부가 돌 아닌 도자기를 구워 지붕까지 해 덮은 기이한 모습이다. 자신이 익힌 기술, 대대로 물려받은 생업의 도구인 도자기로 선조의 묘비를 구워 세운 것이다.
『임복달』, 『임복근』.
나란히 세워져 있는 도자기비가 이채롭다.
『언문이라는 한국어로 된 비문이 새겨진 묘비가 있다던데요?』
아낙네는 이리 다니고 저리 다니며 오랫동안 함께 찾아주었지만 결국 발견하지를 못했다.
시간만 낭비하고 묘소 돌보기를 마친 아낙네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못내 미안한 듯 애석해 했다.
결국 한글로 된 비는 심수관씨 집 뒤뜰에서 발견했다.
『반녀니』라고 새겨진 한글 비는 심씨 정원 안 대숲사이에 있었다. 아마도 심씨 가로 시집 온 어느 여인의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옹기종기 우리 나라 성명이 새겨진 무수한 묘비, 그리고 그것에 하루도 빠짐 없는 치성을 바치는 후예들의 정성어린 손길은 이곳 일본 땅 묘대천이 바로 우리 나라 어느 시골 한 구석처럼 가슴속에 못 박혀지는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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