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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의 시시각각

반기문과 '스펙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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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2010년 6월 기자가 한나라당 의원에게 말했다.

 -친이계엔 영 ‘박근혜 대세론’에 필적할 인물이 없다.

 “왜 없어.”

 -누가 있나.

 “…반기문 있잖아. 나도 있고.”

 여기서 ‘나’는 정두언 의원이다. 2007년, 50세에 킹메이커가 됐던 그다. 그런 이들 사이에 ‘반기문’은 이미 수년 전부터 오르내렸다.

 이제 그의 이름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서울신문 신년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제8대)이 차기 주자 지지율 1위(19.7%)로 올라섰다. 포털에 ‘반기문’을 치면 ‘대통령’까지 연관검색어로 뜬다.

 반 총장이 여론조사 1위로 떠오른 건 유엔 사무총장이란 ‘스펙’ 하나만으로도 이상할 게 없다.

 외교관으로 그는 타고난 것 같다. 충주고 시절 미국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고교생 반기문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봤다. “외교관입니다”가 답이었다(『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신웅진). 후배 외교관들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반반(潘半)’이다. 그의 절반만 해도 성공한다는 뜻이다. 외교가 바깥에선 기류가 조금 다르다. 노무현정부 청와대에서 외교보좌관을 지냈을 때 출입기자들이 붙여준 별명은 ‘기름장어’다. 무슨 질문이든 이리저리 잘 피해나간다 해서다. 노무현정부 출신 인사들이 이 별명을 인용하는 걸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총장으로 만들어줬는데 서거(2009년) 후엔 다녀가지도 않았다. 2011년엔 함께 일했던 김희상 국방보좌관이 한번 다녀가라고 e메일을 보냈더니 ‘벌써 다녀갔다’고 했다더라. 언론이 모르게 다녀가면 무슨 소용이야? 정말 기름장어더라고.”(민주당 A의원)

 반 총장의 임기는 2016년 12월 31일까지다. 2017년에 73세인 나이가 변수지만 대선 참여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진 않다. 대한민국 사상 첫 ‘외교대통령’, 직선제 이후 첫 비영남·비호남·충청 대통령, 국제기구 수장 출신 대통령이 가능할까. 역대 유엔 사무총장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쿠르트 발트하임(제4대)은 사무총장을 마치고 5년 뒤 대통령이 됐었다. 외치·내치를 분담하는 분권형 대통령 모델이 강조되면 반 총장의 강점은 더욱 부각될 수 있다.

 정치는 강력한 진공청소기와 같다. 한때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겸 세계적 자선가인 빌 게이츠까지 잡아당겼다. 빌 게이츠는 “지금 하는 일이 더 좋고, 8년이란 임기 제한도 없다”며 중심을 잃지 않았지만 한국의 빌 게이츠는 지금 신당 창당에 바쁜 걸 보면 한국 정치가 미국보다 몇 배는 더 흡입력이 강하다. 잘나갈 때는 수의학자 황우석 박사까지 빨아들이려 한 게 한국 정치다. 차기 조사 1위로 떠오른 이상 여든 야든 반 총장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 하다못해 불쏘시개로라도 삼으려 할 것이다.

 반 총장은 국사 교과서에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이름이 소개된 몇 안 되는 현존 인물이다. 많은 아이들이 지금 그를 보며 외교관의 꿈을 키운다. 그런 그가 여의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순간 반대 진영은 물어뜯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은 삽시간에 ‘상처 난 기름장어’가 될지 모른다. 대선주자 안철수를 얻는 대신 교과서에 나오는 안철수, 한국의 빌 게이츠를 잃은 것과 똑같이 아이들은 꿈을 정치에 뺏길 것이다.

 그간 맑은 1급수에 살던 스펙 좋은 인사들이 대거 대선가도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그림자의 길이를 실제 키로 알았다. ‘가(假)수요’를 실수요로 믿은 결과다. 이제 1급수엔 어종의 바닥이 보일 정도다. 가수요에 ‘공급확대’로 대응하면 실패하는 건 경제나 정치나 똑같다.

 ‘반기문 1위’를 가수요 때문이라 볼 수만은 없다. 다만 모든 가치가 대선의 하위개념이 될까 걱정이다. ‘스펙정치’만으로 성공한 예도 ‘아직까진’ 없다. 역대 대선 승자는 모두 물이 뿌옇고 바닥이 잘 안 보이는 3급수에서 컸다. 우리 대선이 3급짜리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