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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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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희생된 안영달>
8월15일에는 서울에서 통일 축하 해방기념식을 대대적으로 하겠다고 김일성은 계획하였으나 그 8월15일이 되어도 낙동강은 한발도 건널 수가 없었다.
8월15일까지에는 전국을 점령하기 위하여 남로당의 모모간부들을 유격대 대장으로 뽑아 전선으로 파견하였었다.
이들 중에는 전평 위원장을 지내다가 월북하여 노동상을 하던 허성택, 그리고 경북의 성군당 위원장, 그리고 중앙선전부 선동과장을 하던 박종근 등이 있었다.
김일성의 전술은 기습 전이며 북한의 전력은 총력전으로서는 후방이 얕으며 약하였다. 8월이 되니 병력보충이 소모에 따르지 못하여 40대의 훈련도 받지 못한 병졸들이「트럭」이 없어 소달구지를 몰고 전선으로 나가는 형편이었다.
이럴 때 8월초에 이르러 서울에서 안영달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었다. 안영달은 이승엽의 일제 때부터의 직계부하이며 6·25 직후에는 이승엽의 「블랙·챔버」(비밀기관) 토지 조사회의 책임자고 곧 뒤이어 경기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세도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영달의 자취가 보이지 않게 되자 『김삼룡·이주하가 잡힌 것은 안영달 때문이다』라는 소문이 당 내에서 돌기 시작하였다.
1950년3월27일 김삼룡이 안영달의 「아지트」로 찾아가서 그곳에서 잡힌 것은 사실이었다. 김삼룡·이주하가 체포당한 후 안영달은 그의 부책 조용복(경남 밀양출신·안파동향)과 치안국 사찰과 중앙분실장 백형복(전남 장흥군 출신)을 남로당 「프락치」라고 속여 1950년 5월초에 월북하여 평양서 이승엽과 만났다.
이북에 가서는 시울에서는 남로당원은 다 체포되어 위험하여 부책 조용복과 「프락치」 백형복을 데리고 일시 이북으로 피난왔다고 했다는 것이다.
뒤에 이승엽 일파가 미국의 간첩이라고 체포된 원인의 하나가 안영달의 이러한 행동에 기인한 것이다.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안영달은 49년 여름에 서울서 체포되어 총살을 면하지 못하게 되어 지리산골로 끌려갔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는 살기 위하여 전향하여 다시 시울로 올라와서 돈 2백만 원으로 관헌을 매수하여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으나 당선에 다시 붙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당선에 붙게 되어 김삼룡의 집을 알아내게 되었는가「백형복의 자백서」라는 것을 잠깐 보기로 하자. 이것은 북한의 재판기록이기 때문에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참고로 적는다.
백형복이 미국 고문 「니고르스」의 지도 밑에서 김삼룡·이주하를 체포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재판기록 제8권 91∼92「페이지」). 『나는 1950년 1월 안영달과 같이 서울의 남로당 지도부를 파괴하기 위한 공작에 몇 번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영달은 수개월간이나 당의 실제적인 활동에서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당 지도부를 찾아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영달의 제의로 그의 부책을 하던 당시 서울 종로서에 체포되어있던 조용복을 석방시켜 우리의 활동에 끌어넣게 하였습니다.
나는 절대 비밀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그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조용복 석방을 위한 운동비로서 기밀비 30만원을 안영달에게 주어 안을 통하여 마치 당에서 주는 것 같이 하여 조용복의 처를 주어 조용복의 담당 형사에게 뇌물로 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용복의 사건은 당시 이미 종결되어 있었고, 또 연루자가 없었기 때문에 검사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석방시킬 수가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비밀을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치안국장 이호에게 말하여 그로부터 내무부 차관 장경근을 통하여 조용복의 처가 전부터 석방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효과가 나타난 것 같이 꾸며 종로서장에게 지시하여 조용복을 석방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안영달과 조용복을 활동시켜서 서울의 남로당의 내막을 알아내어 1950년 3월27일 김삼용과 이주하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러면 조용복의 자백서라는 것을 계속하여 보기로 하자.
『1950년 1월10일께 밤늦게 안영달과 백형복이 나의 집에 찾아와서 자기들이 힘을 써서 나를 석방하였다는 것, 그리고 이로써 모든 것이 폭로되었으니 지금부터 나의 정치적인 활동과 신변의 안전은 절대로 보장하여 줄 것이니 자기들의 권유에 응하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나 나는 최초에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안영달은 나를 보고 「뭘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가. 이승엽 같은 사람도 공화국과 대한민국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데 우리 같은 것은 별 일 없어 하며 강요하기 때문에 결국 나 자신의 일신의 안전과 정치적인 야망을 위하여 그들과 같이 일을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나는 김삼룡의 직계인 김형육과 같이 일을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안영달을 당 지도부의특수부 책임자 김형육에게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안영달은 전과같이 당선에 불어서당내부에 파고 들어갈 수가 있었으며, 당 지도부에서는 우리들의 이러한 변절 행위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신임하게되어 김삼룡의 거처까지 알게 되었습니다』(재판기록 제10권 301∼312페이지).
『안영달이가 김삼룡을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이승엽은 그 책임이 자기에까지 미칠까 두려워 경기도 인민위원장(도지사 격)에까지 등용한 안영달을 「빨치산」의 1개 대원으로서 전선에 내보냈었던 것이다.「빨치산」대장 박종환에게 도중에서 아무도 모르게 안영달을 쏴 죽여버리라는 밀령을 내려 쥐도 새도 모르게 이승엽은 안영달을 말살해버렸던 것이었다. <계속><제자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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