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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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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로당 탄압>
김일성은 무력으로 서울을 점령한 뒤 철저한 종파주의의 정체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각급 기관의 크고 작은 모든 권력을 자기 손아귀에 틀어쥐기 위하여 실권이란 실권은 북로당원이 잡아 쥐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남·북 노동당원들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고 급기야는 적대관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김일성의 남한에 있어서의 당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간부배치의 방침은 한마디로 『실권은 북로당이 잡도록』하라는 것이었다.
명목적인 「장」은 남로당원을 앉혀놓고 실권을 쥔 「차장」은 북로당원을 배치하였을 아니라 내무기관 (경찰)·검찰·헌병에는 한 사람의 남로당원도 채용하지 않고 북로당이 독점하였었다. 명목적으로 남로당원을 이용하고 김일성이 평양에 앉아서 남한에 배치되어 있는 북로당원에게 직접 지시를 하여 「리모트·콘트롤」하고 있었다.
이러한 간부배치와 통치방식은 마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만주국을 경영하던 그 방식을 그대로 본뜬 것 같았다. 명목적 「장」에는 만주인을 앉혀놓고 실권을 쥐는 자리에는 일본침략자들이 틀어쥔 것과 흡사하였다.
김일성은 남한을 「통치」하는 방식과 작풍을 평양의 북로당 방식 그대로 하였었다. 그리고는 『남로당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파악이 약하다.
건설·행정통치의 경험이 없다』는 구실로 남한의 구체적 현실을 남로당원에게 물어서 의논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남조선의 사정은 서울에 있는 남로당원보다 평양에 있는 북로당원이 더 잘 알고있다』면서 남한의 사정을 남로당원에게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남한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은 『모두가 미제의 노예고, 깡통을 찬 거지고, 몽매하며 자기들 북반부는 선전적이며 남반부는 말할 수 없는 후진지역이다』라는 것이었다.
남한 주민들에게 대한 경멸과 멸시가 대단하며 자기들은 우수한 민족이라서 우리 남한주민들과는 민족이 다른 것 같은 우월감을 가진 말투였다. 그들의 기본인식이 이러하니 사사건건 남·북 노동당간에는 알력이 생겼고 시비가 따랐다.
그들이 북한에서 인민의 위에 군림하여 부리고 있던 관료주의·공식주의를 그대로 남한땅에 가지고 들어와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물욕에 있어서는 정말 거지보다 더 탐욕적이었다. 남한을 「해방하여 혁명하기 위하여 왔다는 그들 북노당원들은 급료 외에 같은 당원인 남로당원에게는 지급하지 않는 출장비와 전시수당을 받고 있었다. 남로당원의 급료의 3, 4배나 되었다.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남로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심한 불공평과 차별대우를 받아야했다.
그들은 서울을 점령하자 제일먼저 북한 화폐로서 한국화폐를 압도하도록 하며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도록 정책을 강제하였었다.
한국은행권에 대하여 북한화폐의 교환 「레이트」를 8배로 끌어올리고 말았다. (실제 물가지수로 본다면 식료품에 한하여 한국물가가 비쌌었으나 피복류에 있어서는 북한물가가 더 비쌌었다). 그 당시 평양에서는 「와이샤쓰」하나 1천8백 원 했었다. 중앙정부의 사무관(지도원) 월급이 1천3백원이니 한 달 월급을 다 주어도 「와이샤쓰」하나 사 입지 못 할 형편이었다.
그러한 자가 서울에 와서는 본봉 1천3백원은 북한의 자기가족이 받고 그 외에 출장비·전시 수당하며 서울에서 받는 것이 3천9백 원이나 됐다. 북화 3천9백원을 서울서 한화로 받으면 거의 8배, 즉 3만1천2백 원을 받게된다. 이 돈으로 서울에서 「와이샤쓰」를 사려면 서른 두 벌을 살 수 있었다. 이렇게 약탈을 하는 것이다. 「해방」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약탈하러 온 것이라고 우리 눈에는 보였다.
이런 돈을 가지고 그들은 팔뚝시계·가죽장화·양복·내복 등 평양에서는 구경도 못하는 고급품들을 마구 사 대는 것이었다. 서울 시민들은 돈 한푼 없고 식량이 없어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얼마나 분하였는지 『저 북한거지 녀석들, 저런 것 구경도 못하였는가』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또 변변한 집이란 집은 아무 법적 절차도 밟지 않고 권력기관과 간부들이 제멋대로 몰수하여 뺏어 쓰는 것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호화주택이 많은 현대적 대도시 상해를 점령하였을 때 그러한 저택에는 손 하나 다치지 않고 노상에서 숙영하였었다. 중국혁명에 반대하는 미국의 잡지에도 그러한 사진이 보도된 것을 나는 보고 중공군은 정말 규율이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과 북로당 간부들은 서울시를 점령하자마자 자기들끼리 서로 좋은 주택을 뺏으려고 앞을 다투는 꼴을 볼 때 이것들이 무슨 「혁명가」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김일성은 토지를 미끼로 하여 농민들을 낚으려 한 몹쓸 전술을 썼다. 김일성은 군사 위원회 위원장의 명령으로 8월15일에 『문서를 작성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구두로 토지를 농민들에게 마구 분배하라! 그 대신 식량과 노력을 공출 받도록 하라!』는 긴급명령을 발하였었다.
김일성의 농민에 대한 기만정책이 이 「명령」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이 「명령」을 듣고 이제 김일성의 힘이 다 빠졌다는 것을 직감하였었다.
김일성의 죄과는 그가 서울을 도망칠 때 숱한 인사들을 납치한데 있다 하겠다. 당초 평양방송은 이승만 대통령 등 한국의 최고지도자 9명 이의의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전하였었다. 그러나 서울에 나타난 북한군과 경찰은 마구잡이로 각계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이승만 정권에 반대한 국회의원·언론인·문화인들까지 체포 감금하였었다. 도망갈 때 그들을 전부 북으로 납치해가고 말았다.
무력통일 그 자체가 정치부재인데서 발생한 것이지만 북한군 점령 하에서는 폭력과 약탈이 횡행하였었다.
무력통일의 내전의 도발과 3개월간의 남한 점령정책의 실태에 의하여 김일성은 통일정권의 지도자로서 실격자라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말았다. <계속><제자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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