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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34)|박갑동(필자 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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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력준비>
김삼룡이 정태식에게 시달한 지시는 「남로당 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건」이었다. 기한은 3윌25일까지였다.
남로당지하당의 남북통일안을 평양의 박헌영에게 보내는 것은 3월 말께라고 우리는 계산하여봤다. 그 안에 입안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나는 관할지도하고 있는 당 조직을 통하여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출판물을 전부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나는 이 작업을 추진하면서 상당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블록」에서 작성한 남북통일에 관한 남로당 지하당의 보고서가 3월 말께에 평양의 박헌영에게 전달되면 뭣에 쓰일 것인가? 박헌영은 이것을 어디에 쓰려고 긴급히 지시하여 왔는가? 4월초에 평양에서 노동당의 중요한 정치위원회가 개최될 때 박헌영은 우리가 작성한 이 보고서에 근거하여 자기의 보고를 할 것이 십중팔구은 확실하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이 남로당 지하당에 통일에 관한 방안을 긴급 보고하라는 필요성이 어디 있을까?
남로당은 「남북통일은 어디까지나 남북의 제정당·사회단체의 회담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통일한다」는 정책대강이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은가. 그 때문에 평화통일의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3상회의결정」을 지지하여 왔지 않은가? 나는 의문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통일에 관한 중요한 회의가 개최되어 모종의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 경우에 관련, 평화통일노선이 결정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력통일노선이 결정될 것인가?
김삼룡을 위시한 남로당지하당 지도부는 대체로 평화통일로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남로당은 그 당시 자기의 무력부대를 가지고 있질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무력을 쥐고 있는 김일성은 겉으로는 「평화통일」운운하나 가능만 하다면 무력통일을 기도할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 당시의 북한정세를 잠깐 살펴보자.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45년 11월초에 최초의 군사보안간부의 양성기관으로서 김책을 원장으로 하고 소련의 「타슈캔트」지방의 한인자치주의 중학교교원으로 있어 교무에 밝은 기석복을 교무주임으로 하여 「평양학원」을 설립하였었다.
여기서 노어와 소련의 군사교정을 가르쳐 장래의 군사간부를 훈련 육성하였다. 이것은 서울의 「군사영어학교」와 비할 수 있으나 다만 「군사영어학교」보다 한 달이나 먼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1946년2월8일∼9일에 걸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그 보안국장에 최용건이 취임하였었다. 이로써 정식으로 보안대가 편성되었고 참모장에 안길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38선에는 「38경비대」가 조직되어 배치되었다.
46년7원에 「보안간부 총 훈련소」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사실상의 「북한인민군」의 창설이었다. 총사령관에 최용건, 문학부·(정치부)사령관에 김일, 포병사령관에 무정이 취임하였다. 개천(영남) 신의주(평북) 나남(함북) 원산(함남) 등지에 보안간부훈련소를 설치하여 신병의 대량징모훈련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훈련한 병원으로 나남사단·진남포여단·강계포병연대·철도경비대 등이 속속 편성되었다.
펴양에는 보안훈련대대본부(육군본부)가 설치되고 그 참모장에는 안길이 임명되었었다.
이렇게 하여 김일성은 드디어 1948년2월8일 「인민군」을 창설하게 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김일성은 남한보다 훨씬 먼저 북한에 자기단독정권 수립과 군대를 가지려고 기도했던 것이 확연하다. 이것을 한국과 비교하여본다면 1948년8월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9월1일에 국방경비대를 정식국군으로 편입하였었고 11윌30일에 국군조직법이 발포되어 비로소 국방부에 총참모부를 두게되고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를 설치하였던 것에 비해 앞질러 군 조직을 마쳤던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자기군대를 중국 공산군식으로 「인민해방군」이라 이름 붙이지 않고 왜「인민군」이라 하였을까? 중공군은 기본적으로 공산당의 당군으로 창설된 인민을 해방하기 위한 군대로 표명됐지만 북한군은 진주해온 소련군에 의하여 편성된 군대이기 때문에 제2차 대전 때의 연합군이 진주한 남한을 침범할 명칭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인민군」최고사령관은 물론 김일성이고 총사령관 겸 민족보위상은 최용건 동문화부사령관 겸 민족보위부상은 김일, 인민군 총 참모장은 강건(초대는 안길이었으나 안의 사망으로 변경됨)이었다. 강건은 경북 상주 출신이다.
당시의 「인민군」의 규모는 제1사단·제2사단·제3사단·제4독립혼성여단·전차연대· 비행연대로서 전병력 인원수는 약5만명에 달하였었다.
이의에 내무성(상 박일우) 군대로서 경비대의 규모는 38경비대 제1여단·제3여단·해안경비대 등으로 병력인원수는 약2만5천명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각 행정 도에 보안대대가 있었다.
1949년2월에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 약 1개월 간 체재하면서 3월17일에 경제문학협정을 체결하는 동시에 군사원조에 관한 비밀협정도 체결하였었다. 이 협정에 의하면 소련은 북한에 보병 6개 사단·기계화 부대 3개 사단 평성에 필요한 장비와 순시선·어뢰정 등 20척, 전투기 1백대 이상을 포함한 항공병기틀 제공하기로 되었다.
1949년3월18일에는 북한은 중공과의 상호 군사방위협정을 맺고 이 협정에 의하여 만주 및 중국본토에 있는 한인부대를 동년 7월부터 10월간에 북한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한인동북(만주) 의용군 제166사는 북한에 들어와서 신의주에 주둔하게 되어 북한인민군 제6사단으로 편성 개칭되었다. 같은 한인동북 의용군 제164사는 북한에 들어와 나남에 주둔하여 북한인민군 제5사단으로 평성 개칭되었다. 중국에서 국공 내전에 참가하였던 부대가 속속 북한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정보는 뭣인가 불길의 예감을 주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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