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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1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공위 반대 투쟁>
여기서 잠시 미·소 공위를 둘러싼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 및 그들의 의중을 살펴보기로 하자.
47년 8월 12일 공위가 무기 휴회에 들어가고 남로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이제까지 공위를 반대해 오던 우익 측은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게 됐다.
이승만은 공위 폐회 열흘 뒤인 8월 23일 「유엔」총회에 파견하는 대표로 자신을 뽑을 것 등을 주장하며 26일에는 남한총선 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단호히 남한만의 정부라도 하루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자 그때까지 공위 반대투쟁과 반탁운동에서 보조를 같이 해오던 김구는 이에 따르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 남북한의 통일정권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대의 입장을 명백히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론 김구가 당시 이승만의 군정수립에 반대한 것은 미군주둔하의 군정수립은 이승만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 명백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구는 자신이 대한임정의 법통을 지니고 있으며 주석의 지위에 있으니 남북한의 통일총선거를 실시하면 반드시 자기에게 유리하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뒷날 남북연석회의 때 북한에 다녀온 김구가 한독당 중앙위원회에 낸 보고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북한에서의 김일성의 정책을 비방하였을 뿐 아니라. 만일 자유총선거를 실시한다면 북한동포의 대다수는 한독당과 김구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견해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고서에서 김구가 김일성을 긍정적으로 본 것은 「혁명가 유가족학교」를 세워 대우하고 있다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여하튼 이승만의 배정 안에 김구가 반대하므로 보수 진영은 김구·김규식과 이승만과 한민당의 연합세력으로 양분되는 비극을 맞았다.
이러자 군정수립에 절대 반대하는 남로당의 입장에서 긍지에 몰리게 됐다. 중앙당은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김구·김규식파의 연합전선을 조직하려고 공작을 했으나 기본이념의 차이로 성공치 못했다. 다만 48년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에 김구·김규식을 참가시키는 일만 성공했다.
그러나 남로당은 대세에 밀리면서도 꾸준히 배선 반대공작을 전개했다.
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결성된 「유엔」임시조선위원단 일행 30여명이 48년 1월 8일에 도착했다. 일행은 상업은행 본점 뒤에 있는 「빅토리·호텔」(지금의 국제「호텔」·일제 때 비전옥「호텔」)에 투숙했는데 당의 산하단체인 민애청원들이 몰려가 시위를 벌였었다.
『「유엔」위원단 물러가라』는「비라」와 구호를 의치며 「데모」하다가 기마 경찰에 충돌, 여러 명의 부상자가 생겨났었다. 당시 남로당은 정면 공격에 실패하자 이면공작으로 위원단의 통역·「호텔」종업원, 심지어는 명월관 기생까지 동원, 그들로 하여금 사업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2차 공작으로는 그들이 보고서를 작성할 때 총선거준비에 이상이 있다는 내용을 쓰도록 회유 또는 협박하기까지 했다.
당시 남로당은 얼마나 그들의 일거일동에 신경을 썼는지 위원단 회의의 내용은 물론 이려니와, 위원 개개인의 행동. 심지어 그들의 취미·기호까지 낱낱이 보고 받고 있었다.
그때 위원단은 서울에 온 이래 총선거 준비를 진행하는 한편 북한에서의 선거를 준비하기 위하여 입북할 것을 요청했으나 소련 측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남한만의 단독 선거실시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 즈음 나는 남대문의 당본부 일화「빌딩」에서 박문규와 자주 접촉했었다.
그는 이강국이 당국의 체포령으로 월북한 뒤 민전 사무국장의 자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농업경제학자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경성제대연구실에 남아 연구생활을 했었다.
나는 그가 대학의 연구지에 쓴 「조선농업경제」에 관한 논문을 전문학교 시절에 읽고 감명을 받았었다.
그는 이강국·최용달과 더불어 경성제대의 가장 우수한 동기 3인으로 꼽혔는데 내가 보기로는 그중 제일 정치성이 없었다.
정치적 소질로 본다면 단연 이강국을 들 수 있고, 조직적 소질로 보면 최용달이 우수했다. 박문규는 비교적 언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집이랄까, 당시 우리는 그의 옹고집 같은 것을 「심주」라고 불렀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51년 3월 서울에서 쫓겨 평양에 도착했을 때였다. 당시 그는 그의 전공에 알맞게 농업상이란 직을 맡고 있었는데, 달리 찾아갈 사람이 없어 그를 찾아갔었다. 그는 거지같이 남루한 차림으로 쫓겨간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나를 농업성의 교육부장으로 일하도록 주선해주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동기 3인중 가장 정치적이었던 이강국이 제일먼저 김일성의 손에 맞아 죽고, 그 다음 최용달이 죽고, 가장 비정치적이었던 박문규가 김일성 밑에서 최후까지 지위를 유지하며 숙청 당하지 않다가 71년 12월 15일 병사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가 알기로 그는 남쪽에서 올라간 공산주의자 중 지위를 유지하다가 자연사한 몇 사람 중의 하나이다. <계속>【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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