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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인도군의 포로관리(10)|설득설전(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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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설득 전쟁을 끝마친 2만 여명의 반공 포로들은 인도 군 관리아래 들어간지 1백 20일만인 54년 1월 20일 상오 10시 42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비무장지대 남방 경계선을 넘기 시작하여 속속 자유의 품에 안겼다.
이 무렵 한반도의 정세는 인도군의 포로 석방 문제를 둘러싸고 몹시 긴장돼 있었으며 시중의 금값이 치솟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즉 공산 측은『만약 인도 군이 포로석방 조치를 취한다면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 중대한 결과를 일으킬 것이다』라고 위협하면서 「석방」을 극력 반대했고 유엔 측은 이에 대해『만약 공산 측이 포로 석방을 방해한다면 전면적인 전쟁이 재발할지도 모른다』고 응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NNRC 의장 겸 인도군 총 사령관인 티마야 중장의 영단에 따라 포로석방은 유엔 측 주장대로 단행됐고 인도군은 3백 49명의 친공 포로 인수를 거절하는 공산 측의 협박을 묵살, 1월 23일 상오 0시 1분을 기해 일체의 포로관리를 포기해 버렸다.

<공산 측, 친공 포로 인수 거절>
이로써 비무장지대 안에서 90일간 벌어진 설득 전쟁은 끝난 셈인데 쌍방의 전과를 비교해보면 공산 측이 반공포로의 1.14%에 불과한 2백 50여명을 회유, 귀환시킨 데 비해 유엔 측은 비록 설득을 통한 귀환은 없었지만 친공 포로의 2.23%에 해당하는 8명(한국인 6명·미군 2명)의 포로가 자진 탈출해 나와 설득전도 역시 우리가 승리했다고 보겠다.
중립지대를 나온 한국인 반공포로들은 운집한 수만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서울을 경유, 대전·군산·포항 등지에 임시 분산 수용됐다가 1월 23일 유엔군으로부터 한국군 포로관리본부(본부장 최석 소장) 의 정식 포로 인수식을 거쳐 석방돼 군 입대나 취직알선 등을 받았고 중국인 반공포로들은 1월 21일 전원 미군 LST편으로 인천항을 출발, 대만으로 향했다.
공산 측이 인수를 거절, 중립지대에 그대로 방치한 친공 포로들은 군사분계선까지 뛰어나와 소란을 피우는 등 끝까지 발악을 계속했다.
그러면 1·23반공포로 석방모습을 관계자들로부터 들어보겠다.
▲홍사응씨(당시 반공포로 인수 한국군 대표·소령=현 예비역 육군 중령·원호처 수호국장·46) <설득기한이 만료된 중립지대 안의 반·친공 포로 석방문제를 둘러싸고 찬·반으로 갈라진 유엔 측과 공산 측의 극한적인 대립은 위험수위에까지 도달, 항간에서는 전쟁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었읍니다.
그래서 금값은 한돈 중에 3천원으로 치솟고 쌀값도 폭등하는 등 당시의 불안한 정세는 곧 시점에 반영됐고 루머는 꼬리를 물고 떠돌았어요.
티마야 장군이 54년 1월 19일 마침내 『포로들은 23일 현지석방을 하지 않고 이에 앞서 20일 각기 종전의 관리국 측에 이양할 것』을 설명함으로써 한반도를 뒤엎었던 먹구름은 걷히기 시작했고 일반 시민들의 위기의식도 사라져 버렸어요.
이 무렵 문산을 중심으로 한 서부 전선일대의 유엔군 전차와 모든 화기의 포구는 북쪽을 향한 채 완전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기해 있었고 판문점 부근으로 가는 일체의 차량들이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었어요.

<반공포로 인수에 거국적 환영>
나는 보좌관으로 대위 2명을 데리고 반공 포로 인수 한국 측 대표로 몇 달 전부터 문산에 들어가 예행연습까지 하면서 물샐 틈 없는 준비를 완료해 놓고 있었읍니다. 포로 인수시의 경비 책임은 미1군단.·미 해병사단과 한국군 헌병들이 맡았는데 5백여명의 국군헌병들은 3개월 전부터 현지에 나가 반공포로 인수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어요.
1월 17일부터는 5백여대의 차량과 열차가 문산 북방에서 자유의 품으로 돌아올 반공 포로들을 기다리고 있었구요.
1월 20일 아침 문산에는 백두진 국무총리·손원일 국방장관·백선화 육군참모총장·스티븐즈 미 육군 장관을 비롯하여 헐 유엔군사령관·테일러 미8군 사령관·최덕신 한국휴전회담 대표·최석 한국대표 인수단장·박영준 정훈감 등 한·미 고위 장성들이 중립지대에서 나오는 반공 포로들을 환영하기 위해 비래하더군요.
예정시간보다 1시간 40분이나 늦은 10시 42분 그처럼 고대하던 반공 포로들이 25명씩 열을 지어 자유의 다리 쪽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합디다.
나는 인도군 삭스 대사와 포로 명단과 인원수를 대조해 가면서 반공 포로 인수에 관한 사무적인 절차를 밟아 나갔읍니다.
이렇게 해서 20일 하오 7시 55분까지 인도 군으로부터 7천 7백 54명의 한국인 반공포로와 1만 4천 3백 21명의 공산군 출신 반공 포로의 인수를 완료했어요.
한국인 반공 포로들은 인수와 동시에 7개 열차에 분승, 서울을 거쳐 환도는 대전으로, 나머지는 군산과 포항으로 이동 수용시켰고 중국인들은 내한한 석방 반공포로 환영단(단장 국·자유중국입법원 부의장) 과 화교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인천으로 내려가 대기하고있는 미군LST를 타고 대만으로 건너갔읍니다.
한국 정부는 23일 영시를 기해 이들 반공 포로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분신」을 부여하고 하오 4시 유엔군으로부터의 포로 인수절차를 마쳤어요.
인수식에서는 한국과 중국을 대표해서는 백선화 대장과 뇌 소장이, 유엔군 측은 스티븐즈 장관·테일러 대장이 각각 문서에 서명을 했읍니다.
공산 측은 19일 밤 확성기로 반공 포로수용소를 향해『유엔군 측으로 돌아가는 반공포로는 총격을 가해 사살하겠다』는 마지막 협박을 해대더니 급기야는 자기네들 친공 포로의 인수를 거절해 버립디다.
인도군의 관리 포기로 중립 지대에 방치되고만 3백 50여명의 친공 포로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려는 등의 광태를 부리다가 결국은 공산 장막 속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어요. 지난했던 포로관리 업무를 마친 인도 군은 2월부터 17일 사이에 모두 이한, 귀국했읍니다.
▲김문주씨(당시 중립지대 반공 포로 병원 수용소 포로=현 1급 원호 대상자·서울거주·41) <1월 18일이 되니까 20일 나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돌더군요. 우리 포로들은 23일에나 나갈 수 있는 줄로 알았는데 19일 저녁때가 되자 내일 석방된다면서 짐을 꾸리라는 정식 통고가 오데요. 우리 반공 포로들이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짐을 꾸리는데 공산군들은 스피커로『남으로 가지 말고 북으로 돌아 오라』 는 방송을 밤새껏 해댑디다.
20일 아침부터 유엔군에 인계되기 시작한 우리 포로들은 건강한 부산·논산수용소 동지들이 먼저 걸어나가고 병원의 환자들은 맨 나중에 앰뷸런스로 나왔어요.
수용소를 나올 때는 정문 양쪽에다 남·북을 표시한 큼직한 팻말을 세워놓고 50m간격으로 한 명씩 걸어 내보냈는데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택의 기회를 주자는 인도군의 배려였던 것 같아요.

<형제 자매 극적 상봉 양면도>
수용소를 나온 반공 포로들은 조그만 다리 하나를 건너 자유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판문점의 그 다리가「자유의 다리라고 불리어 졌어요. 반공 포로 인수자는 형식상으로는 유엔군(미군) 이었지만 한국인 포로의 인수 및 관리는 사실상 한국군이 일체를 주관했읍니다.
병원지부 수용소 반공 포로는 대전으로, 논산 수용소는 군산, 부산 수용소는 포항으로 각각 이동되는 도중 용산 역에서 서울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역에서 열차가 멈추었을 때 몇 명의 석방, 방공프로는 형제자매를 극적으로 상봉하기도 했어요. 환자포로인 나는 대전육군 제2 정양병원으로 들어갔다가 4월 9일 퇴원했읍니다.
◇주요일지(1953년 7월 1일∼ 5일)
※1일 ▲미 순양선 맨치스터호, 원산만서 피격 ▲중공, 이대통령이 휴전 방해한다고 비난
※2일 ▲미 공군, 중부전선서 30대 내지 40대의 적 탱크 공격▲독도에 함정 파견 결정
※3일 ▲이대통령·로버트슨 특사 회담 계속 ▲민국당, 조병옥·김준연씨 피습에 담화 발표 ▲부산서 시위군중, 민국당 본부 습격 ▲동부베를린 시내에 진주했던 소 탱크 철수
※4일 ▲미8군사령부, 용산이전 ▲왕동지 자산 중국대사, 이 대통령방문 요담 ▲ 폴란드에 반소 폭동
※5일 ▲모스쿠바 방송, 이대통령의 휴전반대 태도를 비난
◆알림= 『인도군의 포로관리』는 이번 회로 끝내고 다음부터는 『미결의 종장, 제네바 정치회의』를 다룬 다음 7월 27일(금)에 『민족의 증언』은 만 3년 4개월 안에 총 4백 89회로 대미를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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