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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정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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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매일같이 신문이 들떠 있다. 들떠 있을 만도 하다. 너무나도 놀라운 발굴이기 때문이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신라예술의 정화들이 한 고분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미 나온 것만도 3백여점, 아직 얼마나 더 땅속에 묻혀 있는 지도 모른다.
오랜 영화와 풍요 속에서 신라인들이 다듬어 나간 뛰어난 미의식과 사치로 보아 그만큼 장식품이 흔했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왕공 귀인들은 금관에, 귀고리에, 목걸이에 팔찌에, 가락지에 그리고 허리띠를 둘렀다. 그 모두가 황금 제이며, 사이사이에 구슬이 달려 있었다.
화랑들까지도 소금관에 금은주옥으로 장식된 무복을 입고, 금동화를 신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눈부신 요대를 차고 거기에 요패물을 주렁주렁 달았다. 그들이 귀고리·목걸이·팔찌·반지를 낀 것은 물론이었다.
그만한 태평을 누릴 수 있던 때였으리라. 같은 요대에도 옥·금·은·동·철의 사용이 신분과 계급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다. 그만큼 귀금속이 흔했던 탓도 있었다.
현재 경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금관총 금관을 보면 작은 금판의 영락판이 1백 30개와 비취의 작은 곡옥 57개가 역시 금으로 만든 철사로 묶여 달려있다.
신라인의 장신구들이 놀랍도록 풍부하고도 정교했던 것은 당시의 야금술이 그만큼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보면 철유전이라고 하여 금속을 다스리는 관청이 따로 있었다. 또한 유조에 관한 기술자가 절마다 따로 있었다.
당나라로 수출한 품목 중에도 금비녀며 기타 금은제 장신구들이 많았다. 당보다도 뛰어난 야금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놀라운 것은 그 뿐이 아니다. 『높이 12.7m, 직경 47m의 고분은 돌이 동서로 15m, 남북으로 12m나 둘러싸고 있어 목곽이 받는 중압 이 대단했었는데도... 유물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는 보고가 있으니 말이다.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진 다라니경이 지난 66년 10월에 석가탑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했었다. 1천 3백년동안이나 멀쩡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다라니경이 발견된지 4년 후에는 온통 벌레에 좀 먹히고 말았다. 이번 고분 1백55호 때에도 누구나 장한 발굴이라고 법석들이다. 그러나 발굴작업에 관계했던 한 과학자는 이렇게 유감의 뜻을 말하고 있다. 『나는 여름과 겨울철의 발굴작업을 피해 달라고 건의했어요. 15∼20도가 적당한 기온입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6도의 무더위 속에서 작업을 강행했다. 왜 그랬을까. 망연한 의문을 아무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 너무나도 모든 사람들이 들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뜨거운 태양열을 받게된 유물들은 당장 부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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