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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 중립지대안의 수용소(3)|인도군의 포로관리(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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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공산측은 10월초의 총격사건을 계기로 인도군에 대한 한국정부와 반공포로들의 감정이 가일층 악화되자 이를 교활하게 이용, 무력 충돌까지를 획책했다.
우선 그들은 인도군에 대한 태도를 일변, 친공 포로들에게 『인도군은 친미파이니 경각심을 높이라』던 처음 지령을 『이제는 친선을 도모하라』는 것으로 바꾸었다.
다음 단계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설득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강권을 발동해서 끌어내 오라』고 요청, 인도군과 반공포로들간에 유혈사태를 유발시켜 급기야는 한국정부가 인도포로 관리군에 무력조치를 취하게 하자는 음흉한 수작을 부렸다.
그러나 공산측이 설득까지 중단하면서 강력히 주장한 「강제권 발동」시비는 「스위스」 「스웨덴」이 반대하고 「체코」 「폴란드」가 찬성을 하면서 팽팽히 맞섰으나 「캐스팅·보트」를 쥔 인도가 부표를 던짐으로써 꺾이고 말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티마야」중장을 비롯한 다수의 인도군은 포로관리에 중립 내지는 오히려 친서방적인 태도였지만 일부 친공적인 인도군과 당시의 정세가 반공포로들로 하여금 끝까지 그들을 경원시 하게끔 만든 것 같다.

<인도군 열차 전복계획 실패>
반공포로들은 심야「데모」, 수돗물 홍수작전 등으로 인도군들을 괴롭혔으며 특히 NNRC의 「체코」 「폴란드」대표들에게는 오물을 퍼붓기까지도 했다.
이같은 포로들의 항거에 간곡한 설득을 펴던 인도군 사령부는 마침내 군법회의를 개최, 10여명의 반공포로를 영창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중립지대안의 반공포로들은 그들의 제일 투쟁목표인 공산군의 설득에 대한 항쟁과 인도군·「체코」·「폴란드」등에 대한 투쟁을 꾸준히 계속해 나갔다. 인도군은 한국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그들의 군용열차를 전복시키려는 반공포로와 해병총사령부의 도전(?)을 받는 등 한국정부와는 끝내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면 당시 반공포로들과 인도군간의 갈등을 관계 증인들로부터 계속 들어보겠다.
▲이동창씨(당시 중립지대수용소 반공청년단 부산지소장·현 서울거주·51) <우리 반공포로들은 인도군 관리하에 들어간지 며칠 안돼 김일성 성명이 흘러나오는 수용소 「스피커」들을 모두 때려 부쉈습니다. 그러한 성명을 틀어놓는 인도군의 진의야 어떠한 것이었든 간에 우리송환거부 포로들은 그들을 친공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공산당이라면 씹어먹고 싶은 심정인 우리 반공포로들이 그따위 「선전」을 듣고자 할 리가 있겠어요. 더우기 발포사건은 설상가상으로 우리들의 반인감정을 끝내 돌이킬 없이 역류시켜 놓고 말았어요.
이렇게 돼 반감은 자꾸만 경화돼 갔고 수용소 안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반공」을 겸한 인도군 비난「데모」가 벌어졌구요.
우리들의 「데모」는 간혹 소일거리 같은 감도 없지 않았지만 인도측으로서는 아주 난처한 문제였어요.
심지어는 변기를 가지고 나가던 반공포로들이 친공 중립국 대표들한테 오물세례를 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때면 인도군 당국은 몹시 당황하는 눈치입니다. 나는 대인도군 감정이 극도로 악화돼 있던 10윌 하순 반공포로 대표 자격으로 「티마야」장군을 면담했읍니다. 통역은 영어에 유창한 우리 수용소의 이창복 동지가 나섰구요.
「티」장군은 『나 개인은 절대 자유주의자』라고 전제한 후 『반공포로들은 북으로 가면 고향의 부모처자가 있는데 사상이 무엇이길래 송환을 거부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정말 여기에 와서 새로운 것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인도군의 포로관리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합디다.
나는 『우리들의 「반공」이념은 목숨보다 더한 것』이라고 얘기하고 나왔지만 그래도 그는 선뜻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데요
결국 인도군 사령부는 설득장 안에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극렬한 시위를 주동한 반공포로들을 군법회의에 회부, 영창에 집어넣더군요.
이렇게돼 투옥된 포로들을 이승만대통령은 인도군이 납치해간 것으로 알고 한국군 해병대 1개 사단을 동원, 뺏어내 오겠다고 까지 했었어요.
석방된 지 사흘만인 54년1월26일 헌총사에서 나를 부르더니 귀국하는 인도군 군용열차를 전복시켜 보라고 하데요.
동지 50여명을 모아 신촌역 부근의 철로 위에 멍석을 깔아 인도군이 타고 내려올 열차를 넘어뜨릴 작전계획(?)을 세우고 「D」데이에 나갔더니 이미 정보를 안 미군 당국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어 실패하고 말았읍니다.

<사제폭탄으로 혼내 주기도>
▲김성록씨(당시 중립지대수용소 반공청년단 병원지부장·현 반공청년회 중앙위원·동두천 거주·49) <북한공산군은 우리 반공포로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리들 수용소가 맞바라 보이는 북쪽언덕에 초가들을 지어 저녁때면 연기를 모락모락 내게 하고 물동이를 인 여자, 어린아이들, 강아지 등을 전시합디다.
또 고성능 「스피커」를 대놓고 포로교환 때 넘어간 공산군 포로들을 동원, 중립지대로 막 이동된 반공포로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구슬픈 노랫가락을 흘려 보내기도 하구요. 이럴 때면 우리 포로들은 깡통을 두드리며 반공청년단가를 부르고 「데모」로 공산군에 대항, 잡념들을 없앴어요.
공산측은 우리 반공포로들의 대인도군 감정이 좋지 않아지자 중립지대에 수용된 친공포로들에게 재빨리 인도군과 우대를 다지라는 지령을 내렸어요. 이같은 낯간지러운 그들의 술책은 탈출한 친공포로들에 의해 낱낱이 폭로 됐었어요.
공산군의 지령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 반공포로들은 인도군을 「친공」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보복을 갖가지 방법으로 취했어요.
인도군을 몹시 괴롭히지 않을 수 없던 이유 중의 또 한 가지는 반공포로 자신들이 배신자를 처벌할 때의 소란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한밤중의 횃불「데모」를 통한 「소란작전」, 경비병 막사에 수돗물을 틀어대 물난리를 피우는 「홍수작전」등으로 인도군을 괴롭힌 것은 그들이 공산군의 술수에 말려들어 친공화 하는 것을 응징하고 우리 반공포로 자체의 비합법적인 거사들을 숨기려는 일석이조의 의미를 가진 전략인 거였지요.
인도군들은 어수룩하기 짝이 없어 우리들의 계략에 대부분 꼼짝없이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인도군을 혼내주기 위해 한번은 휘발유를 「링게르」병에 넣어 사제폭탄을 수십개 만들어 놓은 후 하천변 낮은 곳에 세워놓은 그들 막사쪽에다 수도물을 5시간동안 틀어 놨어요. 그리고는 흘러 내려가는 물위에다 휘발유 5「드럼」을 부은 후 그 위에 「링게르」병을 띄우고 불을 그어됐습니다.
휘발유 불길 속에서 사제폭탄들이 터지면서 요란한 폭음을 내니 오죽이나 소란했겠어요. 하여튼 인도군들은 모두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아우성을 치며 혼비백산들을 합디다.
한밤중의 횃불「데모」는 평균 사흘에 한 번씩은 했어요. 담요를 찢어 뭉쳐서 휘발유를 발라 횃불을 만들어 모두 하나씩 들고 빈「드럼」통을 두들기거나 빈반합에 돌멩이를 넣어 흔들어 대면서 수용소 철조망 주변을 빙빙 돌아댑니다.
이렇게 되면 인도군들은 무슨 폭동(?)이라도 일어난 줄 알고 잠자리에서 「팬츠」바람으로 총만 들고 뛰어나오거든요. 못이기는 체하고 막사로 들어간 우리들은 낮에는 얌전하게 잠을 실컷 자며 지내다가 밤12시가 지나면 이같은 「데모」를 또 시작, 인도군들을 잠을 못 자게 하는 거예요. 계절이 겨울이었으니 더운 지방에서 온 인도군들은 덜덜 떨어대야 하는 「야간출동」과 불침의 고문(?) 에 정말 죽을 지경인 모양입디다.
이같은 소란을 전개하는 동안에 「반공」이탈 포로들에 대한 폭력 처벌이 감쪽같이 행해졌구요.
▲나현채씨(당시 중립지대 제38수용소 반공포로·예비역 육군중령·현 서울거주) <제38수용소 자체 통역이었던 나는 12월 중순 귀환을 선동하는 변절 포로를 처단한 혐의로 대대간부들과 함께 영창에 수감돼 인도군의 군재를 받았습니다.
중립지대에서의 우리 반공포로들에 대한 국제재판은 「유엔」군과 공산측이 각각 법무장교를 내보내 변호를 하면서 인도군의 주재로 열렸어요.

<유엔군에 인도되자 석방>
인도군 검사는 『이번 38수용소 사건은 1950년1월1일에 제정한 인도군 군법회의에 의거 심의하겠으며 모든 공식발언은 영어로 해서 통역된다』고 선언한 후 증인으로 출두한 탈출해 넘어갔던 배신 반공포로들로부터 증언을 청취하기 시작하데요.
법정을 살펴보니 재판장석에는 인도군 회장이 앉아있고 뒤에는 NNRC대표들이 자리를 메웠더군요. 재판을 받은 우리 피의자들은 한사람씩 분리 수용됐는데 나는 중공군 포로를 관리하는 인도군 대대본부 사무실 옆에 있게 됐어요.
인도군들의 생활을 살펴보니 장교들은 변소에 갈 때 휴지를 갖고 가지만 사병들은 병에 물을 담아 두었다가 『빠니, 빠니(물, 물)』하며 물병을 찾습니다. 그들은 휴지 대신 손가락으로 닦고 물로 손가락을 씻는 거였어요. 그 끝을 보니 우리 한국인을 자기들보다 미천한 것으로 오인하고 문화인인체 으시대는 인도군들이 정말 가소롭데요.
인도군의 군재를 받고 수감돼있던 총10여명의 반공포로들도 54년2월4일 「유엔」군에 인도되어 무사히 석방됐습니다.
◆주요일지(53년5월29일∼6월1일)
※29일 ▲변 외무, 휴전성립돼도 전투를 계속 하겠다고 국회서 언명
※30일 ▲「아이젠하워」미대통령, 국무·국방·육참총장 소집코 한국문제를 협의 ▲「아」대통령, 이승만대통령에게 제2차의 서한을 송달
※13일 ▲휴전회담 본회의 6월4일 재개키로 「유엔」군·공산양측의 합의 ▲양주 미대사, 한국군은 전투 계속할 것이라고 TV방송
※1일 ▲이대통령, 휴전전 상호 방위조약 체결하면 현 휴전조건에 대한 반대 철회하겠다고 「로이터」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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