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판고와 풍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삼국유사에 이런 고사가 있다. 탈해왕이 아직 등극하기 전인 낭인시절 산에 올라가 천지를 살폈다. 문득 「삼일월형」의 택지를 발견하고 간사한 꾀를 부려 그 땅을 빼앗았다. 양산촌의 월성이 바로 그 땅이다. 후에 그는 왕이 되었다. 이른바 풍수지리설로 말하면 지덕이 있었던가 보다.
풍수설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고려때엔 그것이 전성하여 국사엔 물론 민간생활에 까지 스며들었다. 그후 이조에 이르기까지 축성·용궐·사찰 및 개인주택의 건축을 비롯해 조묘의 기본조건이 되었다.
풍수의 법술은 산과 물과 방위에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풍수지리는 이상적이다.
가령 산의 형세를 보는데는 용의 현상과 비유된다. 그것을 간룡법이라고도 한다. 용이 기운차게 뻗어 내려오는 형세라야 지기가 왕성하다고 말한다. 혈의 전기운이 거기 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산줄기를 말함)이 있으면 「국」에 와서 장풍을 해야 한다. 그 바람막이를 위해서는 병풍을 둘러친 형상이 필요하다. 따라서 현무를 기점으로 해서 좌청룡·우백호가 반원형으로 둘러싸여 안산이 알맞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수)을 보는 것을 득수라고 한다. 이것은 방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원칙은 길방에서 흉방으로 오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산이나 물은 말하자면 주변조건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어디다 터를 잡느냐』이다. 그것을 점혈법이라고 한다. 그 엄밀한 점법은 수백가지나 된다.
이런 풍수사상은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는 양자강이북, 특히 황하유역이었다. 여기는 바람과 물의 영향이 심한 곳으로 그것은 곧 중국인 생활의 생사와 관련이 되었다. 야수고가 치국자라는 생각도 그런 발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풍수지천에 대한 사상은 현실에서 관념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쳐 원시신앙이나 음양사상과 맺어졌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해인사의 장경판고 신축문제도 결국 풍수설까지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판고는 5백년이 지나도록 몇 차례의 화재에도 안전했고, 통풍·방충 등 자연환경도 나무랄데 없다고 사찰측은 주장했었다. 그것은 삼국시대에 이미 풍수지리에 적합한 위치를 선택했던 것과도 연유될 것이다.
해인사만 해도 그렇다. 고려 현종 이후 7회나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는데, 이조말기엔 당초의 자리에서 옮겨 그 맞은 편에 지금의 해인사를 중건했었다. 이 때의 풍수지리는 비로소 맞아들었던가 보다. 아직도 건재하니 말이다.
문제의 신축예정인 판고는 혈맥을 끊은 자리에 위치한다. 옛날의 고증대덕들이 산세를 감안했던 형상과는 거리가 멀다. 과연 오늘날 풍수의 눈이 얼마나 슬기로운지 모르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