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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첫 중공방문 한국인 나순옥 여사의 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광동에서 북경까지 가는 동안 여러 도시를 거쳤지만 우리는 어디서나 환영회 (첫날밤)∼관광∼환송「파티」(마지막날밤)의 똑같은 「스케줄」을 따라 움직였다.

<환영회마다 혁명pr>
환영회에선 으례 혁명PR가 빠지지 않는 순서로 등장했다.
혁명이후·농업과 공업은 물론이고 생활수준이 얼마나 향상됐는가에 대한 긴 설명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모두 중국사람이긴 하지만 중국본토가 초행이어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브리핑」에 열을 올리다가도 『비교가 안되는 것이 유감』이라며 못 알아듣는 것을 언제나 안타까와했다.
다만 통역만은 일류였다. 어디를 가든 결코 서투른 영어가 아니었다.
이 환영회와 마지막날의 환송 「파티」엔 그 도시의 고위인사들이 다수 참석하는 것 같았으나 『동지 누구』라고 「동지」와 「성」만 소개해 누가 누군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 땅에서 20여 일을 지내고 나왔으면서도 내가 「풀·네임」을 아는 사람은 1명도 없다. 우리와 그들 사이엔 그저 『동지』로 통하고 끝난 것이다.
가는 곳마다 침술시범 관광은 각 도시마다 시 측 안내원 1명과 그 지방 의사 3명의 안내로 했다.
그들은 『어디를 가고 싶으냐. 혹시 얘기들은 데가 있으면 말하라』며 친절히 안내를 해주려고 애썼다.
우리 일행은 모두 의사들이어서 병원방문을 맨 먼저 원했으며 실제로 앞에서 말한 상해2지구, 9지구병원을 비롯해 각종 의료기관을 여러 군데 둘러볼 수 있었다.
특히 광동 인민공사를 비롯, 여러 곳서 침술시범을 보여주어 나의 남편은 시장에 나가 침과 한약을 사기까지 했다.
또한 항주에 머무를 때는 위생국장이 일부러 찾아왔었고 북경에서는 보건부 장관이 자리를 만드는 등 의료관계 인사들도 다소 만났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중공에선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야지 의사들은 시세가 없는 것 같았다.
북경의 한 「파티」의 경우만 보더라도 여러 사람이 나왔지만 전부 외무부라고, 그리고 보건부 장관은 맨 밑이었다. 이점은 비교적 의사가 대접받는 자유세계하고 천지차이였다.
처음 국경서 광동까지, 그리고 항주서 배경까지 탄 기차는 내부가 훌륭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일행이 탄 객차만 새것이고 다른 간은 모두 헌 것이었다. 아마 우리를 위해 특별히 들여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광동에 갈때 탄 객차는 미국제나 영국 제는 아닌 것으로 보아 소련 아니면 동구 것 같았으며 조립만 중공에서 한 모양이었다. 의자도 등판과 팔걸이에 동경사로 짠 「커버」를 대놓는 등 깨끗이 단장이 돼 있었다. 냉방장치도 돼있었다.

<객차는 냉방시설완비>
식당차도 달아 우리만 이용하게 해주었으며 상해서 남경까지 갈때 밥과 반찬을 모두 새로 해서 대접해주었다.
밥은 흰밥(이밥) 이었으나 차진 것이 서울 쌀만 못한 것 같았다. 식당차에서의 차 한잔 값은 5「센트」였다.
여행도중 우리가 묵은「호텔」 모두 최고급이었다. 맨 처음 여장을 푼 화교대청도 광동 제일이었으며 상해서의 「호텔」(14층)은 「닉슨」 대통령이 묵던 곳이다. 우리는 그 상해 「호텔」에서 그곳 당국자들과 만찬을 갖고 「닉슨」 대통령이 좋아했다는 「마오타이」 술을 들었다.
「마오타이」는 역시 화주였다. 멋도 모르고 한잔 먹었더니 목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독한 술은 생전 처음이었으며 「위스키」는 댈 것이 아니었다.

<시골길 거의 포장 안돼>
산업시설을 본다고 달린 시골길은 대부분 포장이 안된 채 자갈이 깔려있었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중공여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그들의 옷차림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당시 입었던 「몸빼」같은 바지였다. 색깔은 검정과 파랑 두 가지. 거리든, 사무실이든, 「파티」든 전천후 바지차림이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중공에서 날씬한 각선미를 감상하기란 하늘에서 별을 마는 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웃도리가 반소매여서 겨우 지금이 여름임을 알 수 있었다.

<전족제도는 노인들만>
전족제도는 늙은이들에게 남아있을 뿐 없어진 듯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은 모두 보통 크기의 발이었다.
장신구를 한 여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인들의 일상생활은 한마디로 일꾼의 쳇 바퀴였다.
우선 사회자체가 여인들도 남정네와 똑같이 일을 하도록 제도화돼 있기 때문인 듯 했다.
아이들을 여인의 품에서 분리, 노동에 지장이 안되게 놓은 것이 그것.
모든 탁아소는 월요일에 아기를 맡아 1주내 데리고 있다가 토요일 하오에 내주고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아침에 다시 받도록 돼있었다.
아기뿐만 아니라 소학교 아이들까지도 상오8시에 등교하면 종일 학교에서 데리고 있다가 하오 5시가 돼야 들려보낸다.
도대체 아이들 때문에 노동을 할 수 없다는 핑계가 있을 수 없도록 돼있었다.
모두 그을은 여인들의 얼굴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이 같은 노동지상주의 때문에 중공에선 우리와 같은 여자무당이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노동제도는 철저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2년간 농촌봉사활동을 하는데 있어 당자가 무슨 공부를 했든 심지어 천재라고 하더라도 면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소학교 졸업생들의 농촌봉사에 있어서도 한꺼번에 가지 않고 A학교가 이달에 가면 B학교는 다음달에 가도록 하는 등 번갈아 보내 농촌일손을 적절히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인들의 사치생활은 절대 인정 안 되는 것이지만 미장원(이용소 경함)은 요금이 싸서 그런 대로 자주 이용할 수 있게 돼있었다.

<미장원세트요금 1원>
요금은 불과 5∼10전. 시간이 없어 못 가지 돈이 없어 못 가는 여인은 없고 어떤 이들은 매일 찾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일 찾아가 봤자 역시 단발머리 손질이 고작이기 때문에 새 유행을 쫓는 우리들과는 근본적으로 사정이 다르다. 북경의 미장원엔 옛날 것이긴 하지만 머리 말리는 「드라이도 있고 「세트」도 있었다. 하지만 자주 안해봐서 그런지 머리는 여기처럼 잘 빗겨주지 못했다.
우리가 묵은 「호텔」미장원의 경우 「세트」요금은 1원(50센트)이었다. 6∼10「달러」씩이나 하는 미국에 비하면 거저나 마찬가지.
한편 남자들의 이발과 면도·세발까지 모두 하는 요금은 30전이었다.
「홍콩」에 나오자 내 동창생(경기여고)의 남편인 「홍콩」주재 한국총영사 박창남씨 부부와 저녁을 같이했다. 내 국적은 아직 한국이지만 박 총영사는 『소련에 처음 들어간 것도 미국의 교포여인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좁은 문이 뚫렸지만 이번도 나 여사의 「스타트」로 중공의 문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어 힘을 돋웠다. <계속><본사 조동오특파원 긴급입수-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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