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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정신 영원히" … 좌향좌 깃발 올린 시진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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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제작비 1억 위안(약 173억원)이 들어간 광둥성 선전의 마오쩌둥 황금좌상. [로이터=뉴스1]

신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 중국 공산당 주석이 26일로 탄생 120주년을 맞았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비롯한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은 베이징 시내 마오주석기념당을 찾아 영구보존 처리된 마오의 시신을 참배했다. 시 주석은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며 “우리는 영원히 마오 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진할 것”이라고 헌사를 남겼다. 이날 중국 전역에서 마오를 찬양하는 노래 ‘둥팡훙(東方紅)’이 울려퍼졌고, 기념 좌담회가 열렸다. 마오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후난성 사오산(韶山)의 생가엔 하루 종일 참배객이 장사진을 이뤘다. 올해 이곳을 찾은 관광객이 11월에 이미 1000만 명을 넘을 정도로 추모 열기는 한 해 내내 뜨거웠다.

 지난 100주년(93년), 110주년(2003년) 때도 전국적인 마오 추모 물결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장쩌민(江澤民)의 14기 당 지도부와 후진타오(胡錦濤)의 16기 지도부가 갓 출범한 때였다. 두 신임 국가주석은 정성을 다해 마오에 대한 헌사를 바쳤다.

집권 뒤 줄곧 정풍운동·군중노선 강조

 올 한 해도 마오를 기리는 현상은 비슷했다. 하지만 양상은 다르게 전개됐다. 당시엔 신중국을 세운 국부(國父)에 대한 찬양이었다면 올핸 좌파 이데올로기의 화신으로 재등장한 느낌이다.

 시 주석이 지난해 11월 당 총서기에 취임한 후 그와 중국 내 좌파는 마오를 전면에 내세워 목소리를 높여 왔다. 시 주석은 1월 당 중앙·후보위원들 앞에서 “(개혁·개방) 전 30년으로 이후 30년을 부정할 수도, 이후 30년을 가지고 전 30년을 부정할 수도 없다”며 마오 치세를 중국의 현재를 있게 한 개혁·개방의 역사와 동등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풍(整風·당 기풍의 정화)과 군중노선 등 마오 사상의 핵심 요체들을 강조해 왔다. 마오 시대 반대파 숙청의 도구로 사용되던 자아비판을 “몸에 좋은 약”이라며 권장하기도 했다.

인터넷 통해 자유주의 번지자 검열 강화

 공산당과 정부의 좌향좌 행보도 따라 이어졌다. 각급 대학교에 세계 보편의 가치, 언론 자유, 사법 독립 등의 주제를 다루지 말도록 지시했다. 민주적 정치개혁 등을 주장한 학자나 유명 블로거들의 SNS 계정이 폐쇄됐고, 상당수가 테러를 당하거나 투옥됐다. 인민일보·중앙TV(CC-TV) 등 관영 매체들은 당의 군중노선과 정풍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편으론 ‘미국이 서구식 헌정(입헌정치)론을 전파해 소련 공산당을 무너뜨렸다’며 헌정을 부르짖는 것은 중국을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주장을 이어갔다.

 지난 8~10월 치러진 보시라이(薄熙來) 재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검찰은 보에게 적용 가능한 모든 혐의를 씌웠지만 그가 충칭시 당서기 시절 벌인 마오주의식 좌경화 정책에 대해선 일절 비판하지 않았다. 시 주석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봤다.

 현 상황이 57년 마오가 주도한 ‘반우파 투쟁’을 연상케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56년 마오쩌둥은 정풍운동의 일환으로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 운동을 벌였다. 당원이 아닌 일반 인민의 언로를 틔워 공산당 정권의 부조리를 비판케 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지식인들은 이내 열띤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공산당 일당독재를 부정하고 복수정당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마오는 인민일보 등을 동원해 우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내 55만여 명이 우파분자로 낙인 찍혀 숙청됐다. 현재는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 등을 통해 네티즌이 비판을 주도하고 당이 검열과 단속으로 탄압하는 형국이다. 샤예량(夏業良) 전 베이징대 교수는 “문화대혁명 시기 어투와 사상의 꺼진 불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 같은 비판 발언으로 10월 교수직에서 해임됐다.

 이를 두고 상당수 전문가들은 개혁·개방 이후 사그라진 ‘이데올로기의 통치’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마오쩌둥은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 등 우파를 공격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차지한 80년대 이후부턴 얼마나 경제적 성취를 이뤘느냐가 정권 정통성의 기반이 됐다. 특히 89년 천안문 사태 이후론 숙청이나 대중운동이 아닌 파벌 간 타협과 합의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을 통해 자유주의가 확산되자 이데올로기 투쟁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 대중이 생활수준 향상의 대가로 공산당 일당집정제를 용인하는 ‘포스트 89년 체제’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서 다시 이데올로기가 전면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시라이는 그런 조류의 시작을 알린 첫 인물인 셈이다.

 로버트 졸릭 전 세계은행 총재는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런 시진핑 체제의 특징을 “마오와 마켓의 결합”이라고 불렀다. 시장중심적 개혁을 심화하면 당의 기득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반대파에 대한 통제 강화로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경제개혁의 부작용을 줄이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마오주의와 시장경제의 혼합 노선이 일관성 있는 정책으로 발현될지는 지켜볼 일”이라고 졸릭은 말했다.

반대파 통제해 공산당 기득권 지키기

 이를 위해 시 주석에겐 마오나 덩에 버금가는 권위가 필요하다. 그가 마오를 앞세우는 건 이런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역사학자 위잉스(余英時)는 BBC 중문판 기고문에서 “마오의 정치적 유산은 바로 중국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점”이라며 “시진핑도 그런 유산에 기대어 자신의 절대적 권력을 확립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마오주의의 부활이 시 주석 권력 강화의 일시적 과정일 뿐이란 분석도 있다. 푸샤오위(蒲曉宇) 미국 네바다대 교수는 “시진핑이 마오의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만 개혁 조치도 계속 추진하고 있다”며 “좌경화가 전략적 후퇴인지 시진핑의 장기적 비전인지는 불확실하다”고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전했다. 주장환 한신대 교수도 “집권 초기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본다”며 “혁명 원로의 아들인 시진핑이 자신이야말로 혁명의 적자(嫡子)란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마오를 더욱 언급하는 것”이라고 봤다.

이충형 기자

마오쩌둥 자주 언급한 시진핑

“우리는 (흥망성쇠라는) 역사 주기를 벗어날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이 길은 ‘민주’다.”(2012년 12월 )

“(개혁·개방) 전 30년으로 후 30년을 부정할 수도, 후 30년으로 전 30년을 부정할 수도 없다.”(2013년 1월 )

“문화대혁명 이후 전적으로 마오쩌둥을 부정했다면 중국 공산당과 사회주의가 계속 서 있을 수 있었을까.”(5월 )

“이곳에 올 때마다 사상적·정신적 세례를 받아 공복의식과 위민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게 된다.”(7월 혁명 성지 시바이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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