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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분의 고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신라 천년의 옛 서울 도주에서는 지금 커다란 덩어리 고분을 발굴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무덤 속을 다 드러낸 것도 아닌데 12일에는 금 동제의 마구가 나왔다고 해서 벌써 화제를 모으기 시작한다. 도굴은 당하지 않은 게 확실하고 또 정성들인 흔적으로 보아 깊이 비장 돼 있을 보배가 여간 기대되지 않는다고 관계자들은 장담하듯 예견한다.
흙을 겹겹으로 다져 쌓아올린 봉 분이다. 발굴은 1개월이 지냈음에도 아직 절반 작업이다. 더구나 그 속 주구에 간수돼 있을 부장품은 한층 궁금증만 더해 갈 뿐이다.
그것은 경주 관광 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경주 도심지의 고분군 가운데 가장 커 보이는 것을 파헤쳐 귀물을 드러낸 뒤 내부 구조와 유물 상판을 고스란히 관람 할 수 있게 꾸며 놓기 위한 사업의 시발이다.
공문 대상으로 선정된 황남리 98호 분은 두개의 봉 분이 겹쳐져 있는데다가 그 높이 22m요 둘레 3백여m. 이같이 너무도 큰 덩어리이기 때문에 서툰 손길을 선뜻대지 못하고 그 이웃의 좀 작은 고분부터 시험적 발굴을 착수했다. 바로 지난 4월초부터 봉토 해체를 착수, 발굴 중인 황남리 155호 분이다.
경주의 숱한 고분 중 버금가는 98호 주위에는 그보다 좀 작은 고분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90호·91호·92호·93호·95호·96호·97호·99호·100호·155호와 그리고 길 건너 봉황 부는 경주 최대의 고분이다. 봉분 몇을 건너 숲 속엔 그 주인공이 밝혀진 미추왕릉이 있고, 교 동에 이르기까지 대충 헤어 봐도 수십 기가 울툭불툭 솟아 있다.
확실히 경주는 고분의 도시이다. 그 시가지 자체가 온통 고분이다. 언제 보아도 경주의 인상은 첫 눈에 띄는 게 시내 곳곳의 고분이요, 그것이 너무도 커서 처음 보는 사람은 산으로 착각할 정도다. 민가들은 봉분과 봉분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으며 산더미 같은 봉토에 눌려 집들이 한결 납작해 보인다. 그들 고분은 평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점차 구릉으로 올라 산 중턱에까지 미치고 있다.
경주 시가지의 고분만도 2백에 가깝고 인근 서악리 충효리 동천리 진문리 금척리 같은 곳에 밀집해 있는 것을 합하면 3백기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도주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고분 밀집 도시라 한다.
일본에도 고분이 많지만 결코 경주처럼 밀집돼 있는 지역은 없다.
그러한 큰 고분들은 높은 지체와 넉넉한 재산을 상징하는 호사스런 추태이다. 그것은 지배자와 귀족들의 것이요, 서민으로서는 그렇게 규모 있는 유택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죽으면 영생의 유택을 만들어 묻는 것이 보통의 관습이었던 모양이나 호화로움을 누릴 수 없는 서민들은 그저 구덩이에 십장 했을 것이다. 남산과 인근 산지에서는 그런 흔적들이 적잖이 발견되고 있는데 석실의 꾸밈새도 초라하고 그 흔한 토기의 부장마저 변변치 않다.
그 부장품을 통해 보면 신라인의 대표적 상표는 상기이다. 어느 고분에서나 토기가 적잖게 나온다. 또 귀고리가 으레 따라나오는데 그 호화로움에 따라 신분을 가능해 볼만하다. 그들은 머리맡에 주요한 식기를 놓았고 생시와 같은 옷을 그대로 차려입고 갔던 것 같다.
남자들은 으레 마구까지 구비 해 놓았다.
아마 신라인들은 몸이 비록 죽었어도 영혼의 영생을 철저히 믿었던 것 같다.초기의 신라불교가 환생하는 미륵 신앙에 집착돼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평시의 옷차림과 생활 도구를 무덤에 함께 묻은 것은 고구려·백제와 또 다른 습속이다.
공주 무령왕릉의 부장품은 다분히 제사 도구, 곧 사자에 대한 개념이 분명한데 신라 사람들의 사고에서는 생사 및 시문의 개념이 그렇게 선명치 않은 것이다. 그들이 무덤과 그 부장품에 글씨를 별로 남기지 않은 것도 그런 것과 다소 연 관이 있다고 풀이된다.
반면에 그들 부장품은 신라의 생활 문화를 밝히는 결정적 자료가 되고 있다. 고분 그 자체가 보다 원시 성을 띠고 있듯이 부장된 장신구와 토기에도 외제가 없다. 오로지 그들 나름의 고유한 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불교가 성행하면서 분묘의 제도가 점점 바뀌어 초기 고분처럼 다양한 생활 문화의 유물을 간직하지 못한다. 통일 신라 이후 석실 고분은 왕릉에 한정되는 것 같으며 일반인은 대체로 화장을 해서 골 호에 담아 산중에 묻었다. 따라서 부장품이 허술해짐으로써 생활 문화상이 희미해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 발굴되고 있는 고분이 부장품에 한층 관심을 두게 하는 것도 역시 삼국 시대 초기의 커다란 고분이란 점에 있는 것이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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