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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휴전회담(후반부)(4)|이 대통령의 항거(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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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진통일이 필생의 염원이던 이승만대통령으로서는 6·25 이전상태로의 복귀를 뜻하는 휴전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수차 「워싱턴」에 휴전반대를 호소했으나 마이동풍이었다. 그래도 판문점회담이 교착되고 있는 동안은 이대통령은 아직 희망을 걸 수 있었다. 하지만 1953년 초에 「아이젠하워」의 새 정권이 들어서고 이어 「스탈린」이 죽고서부터 휴전회담 타결기운이 감돌자 이대통령의 비장한 휴전반대항거는 절정에 달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휴전으로 체면만 지켜지면 한국에서 6·25전처럼 손을 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따라서 일견 무모할만한 그의 휴전반대투쟁도 실은 국익을 최대한으로 지키고 아울러 미국으로부터 한국방어보장을 받으려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이 항거에는 우방이지만 강대국인 미국이 약소국의 운명을 대통령인 자기를 도외시하고 결정하려는데 대한 분노와 반발도 다분히 작용했었다.

<북진용의 없는 우방 철수요구>
여하튼 휴전회담중의 이대통령투쟁은 근대사에 있어 열강과 약소국 관계에 하나의 새로운 예를 남겼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하겠고 그 유형은 20년 후 다시 월남휴전을 다루는데 있어 미국과 월남관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상병포로교환협정 조인 2일 전인 1953년4월9일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냄으로써 재개가 임박한 휴전 본 회담에 대해 다시 포문을 열었다. 이 대통령은 이 서한에서 만약 중공군의 한국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한다면 한국은 압록강까지 북진할 용의가 있는 나라를 제외하고 모든 우방들은 물러가라고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또 이 대통령은 미군이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싶다면 공군·야포와 함포 지원만 해주고 후방에 있어도 좋지만 만약 한국서 철수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다고 했다.
이 대통령의 4월9일자 서한내용이 매우 과격했다는 것은 「아이젠하워」대통령회고록(Mandate For Change 1953∼1956)에도 잘 나타나있다.
『이 대통령 서한은 문맥도 난폭하고 내용도 퍽 과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무마시키려고 곧 답장을 보냈다. 나는 인위적인 한국의 분할을 끝장내려는 이 대통령과 한국민의 염원이나, 그리고 중공침략자를 내몰려는 생각도 잘 이해한다고 전제하고 다음의 네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로 「유엔」이 한국에서 취한 행동은 북한과 중공의 한국에 대한 침략을 격퇴하는 것인데 이 목표는 달성되었다.
둘째로 이 목표가 달성된 이상 평화적 수단으로 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명예롭게 전투를 중지하는 것까지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로 미국과 「유엔」은 한국통일을 지지해왔지만 전쟁으로써 이 정책을 수행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네째로 휴전은 곧 한국통일을 위한 정치교섭 시작을 뜻한다.
나는 끝으로 우리는 한국이 당면한 제문제해결을 구하고 있지만 만약 한국정부가 미국과 우방들이 지지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라는 경고의 뜻도 첨가하고 있다.』

<"휴전회담 우리 주도로" 역설>
한편 휴전회담 한국대표는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어떤 태도로 판문점을 드나들었는가를 최덕신씨 체험수기 『제2의 판문점은 어디로』에서 추려보겠다. 최씨는 백선엽 이형근 유재흥 이한림씨에 이어 마지막 휴전회담 한국대표였다.
여기에는 휴전회담에 대한 이대통령의 결의와 심경이 잘 묘사돼있다.
『휴전회담이 재개되려던 무렵 나는 동경에 있는 「유엔」군사령부 파견 한국군연락장교단의 일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단장은 공군의 김정렬 장군이 맡고 해군은 정기섭 대령. 그리고 내가 육군대표였다. 그때까지 나는 이승만대통령과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
내가 사관학교장으로 있을 때 졸업식에 참석하셨기 때문에 가까이 만나 뵈었고 두번째는「클라크」사령관 초청으로 그분이 동경에 오셨을 때였다.
1953년4월 어느 날 본국으로 출장을 갔을 때 유재흥 참모차장의 간청으로 휴전회담 한국대표직을 맡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우선 대통령을 만나 뵙고 지시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더니 유 장군은 약간 고개를 기우뚱하면서 「글쎄요, 지금까지 다른 대표들은 아무도 대통령을 만나서 지시를 받지 않았읍니다. 그리고 미국 측이 대통령과 만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니 꼭 만나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라고 경험에서 얻은 그분 의견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시기가 이렇게 중대할 때 무거운 책임을 맡고 나가는 한국대표가 미국사람이 싫어한다고 해서 국가원수의 지시도 안 받고 회담에 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나의 결심을 말했더니 그분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경무대공보비서관인 장기봉씨에게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는데 진해별장으로 가라는 이야기였다. 그 날로 군경비행기를 타고 진해로 가서 대통령을 만나 뵈었다. 나는 퍽 긴장이 되어 대통령안색을 살피며 「이번에 휴전회담대표로 나가게된 최덕신이올시다」라고 인사말을 올렸더니 대뜸 「무슨 놈의 대표냐?」하는 불쾌한 어조의 반문을 받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아니면 다른 언짢은 일이 있다가 나를 보고 역정을 내신 건가 번개처럼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이것은 나에 대한 시험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네, 저를 휴전회담대표로 임명한 것은 「유엔」군사령관인 「클라크」대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군 장교입니다. 따라서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한국을 위해 싸워야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원수의 지시를 받으러왔습니다」고 처음 생각했던 소신대로 답변하였다

<최 대표에 휴전반대입장 설득>
그제서야 대통령은 옳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비로소 앉으라고 권하고「그래, 자네 말이 옳아. 사실 공평하게 말하면 자네가 수석대표가 되고 자네가 말을 해야 옳지 미국사람이 수석대표가 되는 것은 옳지 않아…」라고 말문을 열더니 미국사람들이 우리를 제쳐놓고 자기네 마음대로 정전문제를 다룬다는데 대한 불평을 한참 말한 다음 「이런 형편 아래서는 도저히 정전을 할 수 없어. 이것은 항복이지 어디 정전이야. 그리고 이북에는 수많은 되놈 공산당들이 와있다는데 그놈들 때문에 우리동포들이 오죽이나 괴로움을 받고있겠나… 그저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엔」군이 와있는 이때에 그네들을 이끌고 통일이 될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야. 외국사람들은 평화적인 통일이니, 무어니 하지만 공산당에 의한 통일이 아니고 어떻게 평화통일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우선 정전이 안되도록 막을 도리밖에 없는 것이야….」
대강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한시간 이상이나 이분 독특한 웅변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그분의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심에 감동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이 노애국자의 외로운 모습과 심정을 눈앞에 보고 이분을 진심으로 보아 드려야 하겠다는 공감과 의무감이 솟구쳐 올라왔다. 대통령말씀이 끝난 다음 나는 생각나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통령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소관생각으로는 정전이 성립되지 못하게 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산 측이 휴전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반공포로들을 자기편에 끌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공포로를 돌려보낸다면 그들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전세계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세계사람들을 향해서 인도적 입장에서 반공포로들을 절대 돌려보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면 「유엔」군 측이 별도리 없이 반공포로를 돌려 보내는 정전을 하지 못할 것이니까 좀처럼 정전이 안될 것입니다. 다음에 중공군철수문제입니다. 중공군의 철수 없는 정전은 이러이러해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면 중공군 때문에 견디고있는 북한이 그런 정전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 정전이 성립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두 가지 방안을 고수한다면 정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공포로 지켜 정전 거부당해>
대통령은 내 말을 듣고 얼굴에 희색을 띠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것 참 됐어, 됐어….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보아. 그런데 그 주장을 가지고 나가서 싸우는데 보통 각오를 가지고 나갈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성공치 못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나가란 말이야. 정말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는 내 앞에 돌아오지 못해!」
과연 그분다운 강한 명령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강하게 사람을 휘어잡고 부리는 방법을 곧잘 썼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대통령의 생각하시는 바도 확실히 알 수 있었고 대통령지시도 받았으니 명실공히 한국대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휴전회담에 나가게 되었다.』
주요일지(1953년2월17일∼20일)
※17일▲3백대의 미군기, 원산일대폭격 ▲중공, 미기가 만주 침입했다고 비난 ▲「아」대통령, 중공해안봉쇄는 아직 연구단계라고 언명 ▲「스탈린」, 「메논」인 대사와 회담
※18일▲3백80대의 미군기, 평양지구폭격 ▲「미그기 7대 격추파 ▲거제도수용소서 중공포로1명 자살 ▲전북고부서 공비15명, 금융조합 습격 10만환 강탈 ▲ 「덜레스」국무, 한국전의 명예로운 해결 주장 ▲「피어슨」가 외상, 한국 확전 반대
※19일▲미 공군, 평양일대 공습계속 ▲「로지」 「유엔」미 대표, 한국참전국 「유엔」대표와 회담 ▲「스탈린」은 한국휴전 원한다고 인 소식통 언명
※20일▲평양방송, 미 측이 판문점중립지대 침범했다고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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