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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인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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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여러가지로 너무 잦았던 기념일들을 대폭 정리한 가운데에서도 「과학의 날」은 살아남았고 그 살아남은 후의 첫 「과학의 날」기념식이 지난 주말에 있었다.
「과학의 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무엇인가 상징적인 뜻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의 날」을 맞이한 요즈음의 내외상황은 적어도 두 가지 방향에서 「과학」에 대한 불신 내지는 회의의 바람이 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등장한 공해론·환경론의 문제이다. 특히 과학이 다른 여느 지역보다도 훨씬 앞선 선진지역에 있어서 과학이 자연의 생태학적 조화를 깨뜨리고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문제」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사정은 「아이러니」이다. 당초 과학의 무한한 진보가 곧 인류의 무한한 복지를 약속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의 신뢰는 배신당하고 만 셈이다.
둘째로는 과학의 보편적인 명제에 대한 반발이 여러 차원에서 일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삶의 특수한 체험이란 과학의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도저히 다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신비의 영역을 안고있다는, 해묵은, 그러나 끈질긴 주장이다.
그 다음 다른, 좀 더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한 나라의 특수한 역사전통과 사회문화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는 일반적인 명제만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독자적 주체성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별로 새로울 것 없으면서 그러나 빈번히 반복되는 주장이다.
이같은 과학에 대한 불신과 회의의 사조에는 저마다 일면의 진리가 반영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요컨대, 과학은 만능의 신이 아니며, 아니 과학이란 도대체 신이 될 수도 없다. 과학이 목적이고 인간이나 사회가 수단으로써 그것을 섬겨야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행복이나 사회의 정의가 목적이며 과학은 그를 위한 수단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과학을 만능으로 보는 소위 「과학주의」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과학을 부정하는 「반과학주의」는 더욱 위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에 대한 비판은 일단 과학을 뚫고 나온 과학 「이후」에 논의될 성질의 것이지, 비과학적 또는 전과학적인 미신이나 독단의 어둠 속에서 과학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과학에 대한 많은 비판의 화살은 과학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의 한 응용영역인 과학「기술」의 부분을 과녁으로 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은 어느 특정한 역사사회에 구속받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를 지향하고 있음에 반해서 「기술」은 특수한 시대·사회의 특수한 목적에 봉사한다는 실용적인 성질의 것이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과학비판」의 대부분은 실상 과학의 그릇된 악용에 대한 「기술비판」이라 해도 큰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은 「르네상스」이래 바로 이 같은 특수한 시대 사회의 특수한 오류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 거기에 과학의 혁명적 성격이 있었던 것이다.
근대화를 지향하는 한국의 오늘의 현실은 어느 모로 보나 과학을 부인하거나 과학에 대립해서 스스로의 질을 찾을 수는 없다. 해방자로서의 과학, 인간에 봉사하는 과학으로서의 과학 본래의 뜻을 「과학의 날」에 붙여 새삼 음미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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