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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자 퇴화연당초문주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국립박물관이 우리 나라 2천년에 걸친 조각·공예품의 정수만을 가려내어 베푼 「한국미술2천년전」에서 청자들은 대개 낯익은 것들인데 그 중에도 낯선 일품이 몇 점 끼여있다. 동원미술관이 처음 공개하는 청자퇴화련당초문주자는 바로 그 하나. 이건 도예품이기 보다는 오히려 뛰어난 조각품이라는 게 알맞다.
어깨가 도둑한 몸통에는 백토로 연꽃과 당초를 정갈하게, 그리고 굽과 주둥이 부분에도 연꽃잎을 가지런히 배열하는 한편 그 꽃잎의 화심을 철사(쇠의 녹물)로 강조했다. 손잡이와 물꼭지는 대나무를 휘어댄 양 야무지게 붙이고 뚜껑은 탐스럽게 만개한 연꽃덩이를 2중으로 조각한 위에 한 마리 새가 날렵하게 올라앉았다.
고려청자가 한껏 완숙한 12세기께의 작품이다. 오밀조밀 조각한 뚜껑과 철사의 선 때문에 더욱 훤칠한 목, 그리고 엷은 비취색에 은은히 우러나는 몸통의 무늬.
어디하나 나무랄 데 없이 세심하게 배려해 이루어놓은 주전자이다. 도공은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이 한 개의 작품에는 생명이 감돌아 역사의 산 증거와 민족예술의 모범이 된다. 누가 그것을 실용품으로 썼던가를 이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도공의 그 긍지와 내실을 전해 받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청자는 일찍이 중국에서 개발한 회유(잿물)가 발전된 것이고 특히 송나라 때 전성을 이루어 10세기께 그 기술이 우리 나라에 건너왔다. 초기에는 연유·황갈유로 시작되어 음각으로 발전되고 12세기 초 상감수법이 성행되면서부터 퇴화 및 고 청자를 곁들인다. 몽고침입을 전후한 시기이지만 팔만대장경 판이 새겨지고 삼국사기·삼국유사가 편찬되는 등 온 국민이 나라의 줏대를 찾는데 힘을 뭉치던 때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청자는 비록 중국에서 수입한 기술에 의해 개발된 것이면서도 송자와는 또 다른 한국의 조형과 얼을 담고 만숙했다. 한국의 청자가 세계의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빠지지 않는 기품을 지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주전자가 어떻게 입수된 것인지는 소상하지 않지만 동란을 겪는 동안 이만큼 온전하게 수습된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총고 33.8cm. 이홍근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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