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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미래] 0.000000000000001초에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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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1천m 결승. 3위로 달리던 김동성 선수가 마지막 바퀴에서 2위로 치고 나왔다.

앞을 막고 있는 것은 중국의 리자준. 도저히 뒤집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승선을 넘는 순간,김선수는 오른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사진 판독 결과 김선수가 스케이트 날 반개 정도의 차이로 앞서 들어왔음이 확인됐다. 초고속 카메라가 아니었다면 누가 금메달인지 논란이 일었을 상황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 조정 경기에선 불가리아와 벨로루시 두나라의 선수가 똑같이 7분28초14로 결승선을 끊었다. 20분에 걸친 판독 작업이 벌어졌고,벨로루시 선수가 4㎜,시간으로 따져 1천분의 1초 먼저 들어왔다고 결론이 났다.

스포츠에서 필요한 것은 1천분의 1초의 정확도. 맨눈으로는 구분이 안되지만, 요즘 성능 좋은 사진기라면 충분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수 있는 시간이다.

초고속 카메라는 1백만분의 1초 사이에 일어나는 일도 잡아낸다. 이 정도면 총알이 관통해 풍선이 터지는 순간의 모습을 촬영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현재의 카메라로 볼 수 있는 한계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짧은 순간에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 과학이 탐구하는 원자.분자 세계의 현상들이다.

공기 속에서 산소.질소 등의 분자는 시속 수천㎞로 날아다니며 수백억분의 1초마다 다른 분자와 충돌한다. 딱 한번 충돌하는 모습을 보려면 적어도 1천억분의 1초 정도의 순간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시간은 더 짧다. 화학반응이란 한 분자가 다른 분자와 원자들을 주고받아 구조가 바뀌는 과정이다. 이런 변신은 1천조분의 1초 정도 만에 일어난다.

과학자들이 이 같은 1천조분의 1초 정도의 순간에 원자.분자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는 데 도전하고 있다. 화학 반응 등에서 분자들이 어떤 식으로 원자나 전자를 주고받는지 과정 하나하나를 밝혀내겠다는 목표다.

이 같은 분야를 '펨토과학'이라 부른다. '펨토'란 '1천조분의 1'이라는 뜻. 펨토초 사이의 일을 탐구한다는 데서 펨토과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과학자들이 펨토초의 세계를 확인하는 도구는 레이저다. 원리는 카메라와 비슷하다. 카메라로 10만분의 1초 안에 일어나는 일을 찍으려면, 그 정도로 짧은 순간만 터지는 섬광(플래시)을 이용한다.

강한 빛을 아주 잠깐만 터뜨려 그 빛에 노출된 순간의 모습이 필름에 기록되게 하는 것이다. 플래시가 번쩍이는 시간이 짧으면 더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일을 촬영할 수 있다.

펨토의 세계를 관찰하는 데는 1천조분의 1초만 빛을 냈다 사라지는 레이저를 이용한다. 이런 레이저를 원자.분자들에 쬐어 주었을 때, 원자.분자가 내는 반응 신호를 분석해 펨토초 동안에 벌어지는 일들을 확인하는 것이 원리다.

펨토 과학은 전세계적으로도 이제 시작 단계다. 이집트 출신의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아메드 즈바일 교수가 수백 펨토초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을 밝혀 199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며 불이 붙었다.

미국.영국.일본.독일은 현재 펨토 레이저를 갖추고 본격적인 연구에 시동을 건 상태다. 국내에서는 서울대 김대식(물리학과) 교수, 연세대 김동호(화학과) 교수 등이 과학기술부의 지원을 받아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펨토보다는 느린 1조분의 1(피코)초 정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미 과학자들이 정복했다. 이들은 70년대에 피코의 세계를 탐사할 레이저가 개발된 뒤 약 20년간 이 분야를 연구했다.

그 결과 식물이 광합성을 할 때 빛 에너지가 변환되는 과정이나, 빛이 눈에 들어왔을 때 분자들의 반응 등 1조분의 1초만에 일어나는 일들을 낱낱이 밝혀냈다.

본격 연구가 막 시작된 펨토 과학은 원자.분자들이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구조가 변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소상히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연세대 김동호(화학과)교수는 "이 분야가 발전하면 여러가지 분자를 모아 놓고 원하는 반응만 일어나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화학공장이나 약품제조 공장에서 반응을 일으킬 때 원하는 반응이 주로 일어나는 조건만 맞춰줄 뿐이어서, 원치 않는 반응도 어느 정도 함께 일어난다.

펨토과학의 도구인 펨토 레이저는 에너지를 엄청나게 크게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 핵융합을 일으키는 데도 쓰일 것으로 과학자들은 전망한다.

핵 융합은 수소나 헬륨처럼 가벼운 원자핵들이 한 데 합쳐 더 무거운 원자핵으로 변하는 것. 이때 엄청난 에너지가 생긴다. 세계적으로는 핵융합 에너지로 전기를 만드는 연구도 한창 이뤄지고 있다.

핵융합을 일으키려면 가벼운 원자핵들이 한데 뭉치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여기에 막강한 에너지의 펨토 레이저를 이용할 수 있다. 수소.헬륨 원자핵들이 들어붙도록 사방에서 강한 펨토 레이저로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펨토 레이저는 또 머리카락 굵기의 1만분의 1에 불과한 나노 크기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데도 쓸 수 있고, 각막 수술 등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고에너지 펨토 레이저의 자체 개발 계획이 시작됐다. 2008년까지 총 4백80억원을 들여 광주과학원 내 고등광기술연구소에 설치할 예정이다.

이종민 고등광기술연구소장은 "펨토 레이저는 초고속 정보 전달에도 이용될 수 있다"면서 "이 레이저가 완성되면 우리나라 나노.바이오.정보 분야의 과학기술은 크게 진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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