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2013년의 면접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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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4면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입사시험 면접치고는 독특한 질문이었다.

'1백팀이 1대1로 겨뤄 우승자를 가릴 때 최소 몇 게임을 치러야 합니까.'

한편으로 '뭐 이런 게 다 있지?'하면서도 슬며시 웃음이 치솟아 올랐다. 고등학교 때 과외선생이 가르쳐 준 공식이 있었다.'n팀이 우승자를 가리는 최소 게임 수는 n-1'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있게 대답했다. "99게임입니다."

후훗. 나와 같이 면접을 치르는 놈들은 내 말을 베끼듯 답하지 않고는 모르겠지. 그 옛날 배운 시시콜콜한 공식까지 기억하는 내 머리는 역시 보통이 아니야. 최고 기업에 걸맞은 인재가 바로 나지.

거기다 나는 눈 감고도 데려간다는 명문대 경영학과 출신. 플러스로 당숙이 이 회사 임원 아니던가.

이런 조건에다 면접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똑똑함을 발휘했겠다, 입사하자마자 "연봉은 달라는 대로 줄테니 다른 데는 제발 가지 말아달라"고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겠지.

순간 상념을 깨는 소리가 터졌다.

"왜 99게임이죠?"

"n팀일 때는 n-1이니까요."

똑같은 질문이 내 옆의 좀 덜떨어진 것 같이 생긴 놈에게 넘어갔다.그놈은 나보다 약간 길게 답했다.

"1백팀이 각각 1대1로 겨뤄 우승자를 가린다는 것은, 다시 말해 99팀이 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즉 99번의 패배가 있어야 하니까 최소 99게임을 치러야 합니다."

찔끔.저놈 배경이 뭐더라.그래,아까 대기실서 얘기할 때 시골 고등학교 나와서는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했다던가. 배경이 그렇고 그런 놈인데….

그날 저녁 당숙이 전화를 했다.

"이놈아, 집안 망신 네가 시키느냐. 면접한 양반이 '서류상으로는 번듯한데 생각하는 게 영…. 그저 외우기나 잘 할 뿐이지 논리라고는 없다'더라." 당숙이 전화를 거칠게 끊는 쾅 소리가 1백배로 증폭돼 머릿속에서 울렸다. 탈락인가.

울화가 치밀었다. 우리나라 최고 기업이라는 데가 얼토당토 않은 문제 하나로 나 같은 인재를 팽개치다니. 다음날 아침 그 회사의 면접 담당자를 찾아갔다. 뜻밖에도 선선히 나를 만나주었다. 기왕 탈락이니 될 대로 되라. 삿대질을 해가며 따졌다.

"아니, 단지 문제 하나만 던지고서 나의 사고력을 모두 시험해봤다는 겁니까. 골고루 물어봐야 사람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욱한 김에 그 뒤에도 고래고래 소리쳤는데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1주일 뒤 뜻밖의 합격 통지서가 왔다. 정장 차림에, 3박4일간 합숙할 준비를 해오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만 덧붙었을 내용이 있었다.

"문제 하나만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당신의 얘기가 맞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을 테스트하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만,그런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당신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면접 점수는 탈락인데도 합격시키기로 했습니다.이런 것이 우리 회사의 판단 방식이고, 그것이 우리를 세계 최고의 주식 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신도 우리와 일하며 이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배우기 바랍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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