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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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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왕룡이 강가가는 날이다. 신부 아난은 지주의 종이며, 얼굴이 못 생겼다. 농부의 아내는 추부라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의한 것이다.
얼굴은 추하지만 마음씨는 그지없이 곱기만 하다. 왕룡은 참다운 인생의 보람을 느껴가며 농사에 온 정성을 쏟는다.
어린애나 생기고, 담년이 거듭되고,왕룡내외도 새 전답을 사게된다. 그러나 갑자기 기근이엄습한다. 무정한 가뭄이 계속되어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만간다.
사는 길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지노릇하는 것뿐이다. 왕룡일가도 남쪽으로 옮겨간다. 물론 거지다.
어느날 거지들이 부호집에 몰려가서 약탈한다. 왕룡내외도 이때 보석을 한웅큼 훔쳐가지고 나온다. 이것으로 왕룡네는 고향에 돌아와 주인집 땅을 산다.
풍년이 7년동안 계속된다. 왕룡가는 어느덧 부호가 된다. 이제부터 악을 보려는 참에 아난은 과로에 쓰러져 죽는다. 왕룡은 아내의 시체를 묻고 혼자 터벅터벅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저 내땅에 내반년 이상이 묻혔다. 나는 절반이 저기 묻힌 것이다. 앞으로는 다른 생애인 것이다.』 그 후 왕룡의 큰 아들은 집을 지키고, 둘째 아들은 상인이, 그리고 세째 아들은 군인이 되어 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셋 다 땅에서 살고 땀과 함께 죽은 왕룡의 마음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이것이「펄·벅」의 3부작<대지>와<아들들>, 그리고 <분열되는 집>의 줄거리다.
중국의 땅은 광막하다. 그 속에서 초목이 자라나듯 사람도 땅과 함께 자라나고 땅과 함께 묻힌다. 나라도, 문화도 또는 집도 성공한다. 그러나 사람은 잡초처럼 땅속에서 되살아난다. 자연의 생명력은 이처럼 위대하고도 신비로운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온갖 형벌을 다 주며 ,괴롭히는듯 하다. 그러나 사람은 땅, 곧 자연을 동질때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이러한 섭리를「펄·번」은 <대지>에서 얘기하려 했다. 그것은 단순히 중국민족의 성쇠를 그린 서사시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흙과 함께 자라난 중국의 얼을 그만큼 잘 그려낸 작가도 없을 것이다.
때마침 중국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마수가 뻗쳐가며 있었다. 수 없는 난세를 겪어가며, 또 온갖 고난을 이겨낸 중국민족의 위대성을 서방세계, 그 중에도 특히 미국에 알려준 것이 여사였다고 할 수 있다. 땅이있는 한 그들의 생명력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와 함께「펄· 벅」의 이런 「메시지」가 큰 감동을 안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펄·벅」이 38년에「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것도 단순히 문학적인 뜻에서만은 아니었다.
6일 여사는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동안 왕룡의 손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흙냄새도 잊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게 가장 여사에게는 딱하게 보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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