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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통신|지원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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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통신」은 공병처럼 기술과 전투를 겸하는 주요 지원병과다.
근대전에서 통신은 일선부대지휘나 전후방의 연락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뇌신경」인것이다.
통신병은 작전수행을위해 보병전투 지역에 투입되어 통신망을 우선 구축하고 후퇴시에는 최후까지 남아서 아군통신시실을 걷어가지고 나와야한다.
일선 최전초진지까지 전화통을 메고 따라나가는 통신병들은 전황에 따라 통신기술의 발휘에 앞서 먼저 보병전투를 수행하지않으면 안된다.
6·25당시의 군통신장비는 미군정당국으로부터 이양받은 약간의 미군기재와 2차대전말에 일본군이 쓰던 기재로 겨우 명색만을 갖추었을뿐 통신시설이나 정비기술등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기자재 보유현황도 부평 제51대대 통신대대의 창고재고량이 발전기=8대 전원기=7대 송화기=14대 전압계=15개 시험기=12대 계기=10대 정류기=6대 주파수계=4개 전등=12개등에 불과한 상태였다.

<통신자재도 후송 못한채 후퇴>
군통신당국은 이같은 자재마저 완전히 후송을 못한채 혼란속에서 수원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육본통신감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전의 부평창고와 영등포 정부창고등에 보관돼있던 전화선과 건전지등을 실어내옴으로써 아군이 낙동강선으로 후퇴할때까지의 보급 「갈증」을 다소나마 해소시켰다. 낙동강공방전이 전개되면서부터는 통신감실 보급과가 경주에 자리를잡고 통신공병중대를 지휘, 미군지원으로 들어온 야전선·건전지등의 일부기자재를 우선 한국군 1군단에 보급 충당해줌으로써 통신지원은 정비추진기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정비기술은 개전초와 다름없어 영동·안동·포항등지의 전방보급소로 보급을 추진해주고 전선에서 돌아오는「트럭」들이 가득히 싣고오는 파손된 기재들을 대구·부산등지의 민간유무선업자들한테 의뢰해 정비하는 형편이었다.
51년초부터는 미군지원이 본궤도에 오르고 통신기지창을 비롯한 창고중대·수리중대등이 창설됨으로써 군통신업무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정한 기준량없이 제구에따라 적당히 지급하던 통신기자재의 보급체제가 대폭 정비됐으며 또 51년 후반에는 파손기재가 정비단계에 따라 자체 수매되는등 기술도 상당히 발전했다.
그리고 이때까지 사용하던 SCR-694·SCR-536등의 무전기가 일부 AN/GCR-9·AN/PRC-6 등으로 대치됐으며 보급추진이 ⓛ사단 ②군단 ③공병부대 ④야전포병대 ⑤통신부대로 정해진 우선 순위에따라 질서정연하게 실시됐다.
전쟁3년동안 한국군이 사용한 야전전화선은 1백억「달러」어치나 됐는데 거의 전부를 미군지원에의해 충당했다.
국내에서 조달한 통신자재는 50년 30만원, 51년 5백만원, 52년 9백30만원어치에 불과했다.
한국군은 51년과 52년의 격전기에 전신기·전화기·무전기등과 같은 통신기재들을 상당히 망실한반면 노획은 적었는데 이는 적전방부대에는 유무선의 통신기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호나 연락에 의존하는 공산군의 통신수단은 애초부터 아군에 뒤졌지만 이런 격차는 전쟁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53년에는 일선사단과 후방부대의 통신장비표(T/E)가 대폭 개혁돼 기상관측용과 사진기재등이 인가되고 개전당시 1천3백여명이던 병력이 8개통신대대 7천3백명으로 증강됨으로써 한국군의 통신은 장비와 기술을 거의다 갖추게됐다.
그러면 당시 통신감과 부대장으로부터 전쟁중의 통신활동에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체신부근무장정 통신병으로>
▲조응천씨(당시육본제5대통신감·준장=예비역육군소장·현광운전자공대이사·78)<당시 우리 군의 통신시설이란 미군한테 이양받았던 몇대의 무전기가 있긴 했지만 주로 체신부시설에 의존하는 형편이었어요.
시흥을 거쳐 수원까지 무질서한 후퇴를 하다보니 통신대나 통신학교가 그냥 흩어져 버리고말아 어떻게 체계를 세워 통신병들을 지휘할수가 없더군요.
하옇든 통신차감인 내가 직접 전화기를 메고나가 주먹밥에 고추장을 발라먹어가면서 일선 보병부대의 통신을 지원하는 지경이었어요.
대전부터는 해외출장중이던 통신감이 귀국해서 지휘체계를 세워나갔고 나는 폐교한 통신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우선 영도다리 건너의 그물만드는 공장하나를 접수해서 학교자리를 잡고 방송국이나 체신부 근무를 하다가 입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교관을 확보했읍니다.
그리고 나서 울산방면으로 나가 장정들을 모집해들여 통신병들을 양성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통신학교 교장을 계속하다가 51년12월초 제5대 통신감으로 들어갔읍니다.
전선에서 유선전화를 가설하고 무전연락을하는 통신병들의 임무는 아주 위험한일이었고 전사율도 보병에 못지 않았어요.
통신병들은 작전이 개시되면 나가서 선을 가실해놓고 후퇴시에는 맨마지막까지 남아 적과 육박전을 벌이면서 까지라도 선을 걷어가지고 나와야되니까 때로는 보병이나 포병같은 전투병과의 장병들보다 더 고생들을 하지요.
군은 주둔하는곳마다 체신부시설을 접수, 사용했는데 때로는 경찰통신망까지도 이용했읍니다.>
▲김선규씨 (당시 제51통신대대장·소령=예비역준장·현한신공영주식회사부사장·50) <우리 제51통신대대는 6·25당시의 유일한 군통신부대였읍니다.
통신·무선·창고·정비2개가설중대와 사진대·군구대등으로 편성돼있던 제51통신대대는 약1천2백명의 병력을 가지고 육본교환대를 비롯한 군의 통신을 운영해왔어요.
나는 제51대대장을 하면서 통신대대를 하나 더 증설하려고 애를 쓰다가 실현을 못한채 6·25가 터지고 말았어요.
당시 군의 유선통신시설은 육본과 사단에는 TC-10·TC-4 교환대, 연대·대연등에는 6∼12회선정도의 BC-86·BD-72 교환대가 가설돼있고, 전화기는 E-8를 사용했읍니다.
무선으로는 SCR-193(사단), SCR-694(사단∼연대간), SCR-300(연대∼대대간), SCR-536(대대이하)등의 무전기를 사용했는데 성능은 비교적 좋았으나 절대량이 부족해 1개사단에 몇 개씩밖에 없는 실정이었구요.
운용은 육본이나 직할부대는 제51통신대대가 했고, 그밖의 부대는 사단통신중대가 맡았었읍니다.

<적지회고서 전화선꺼내오고>
나는 마침 통신감 정농환대령이 일본에 출장중이라 전쟁이 발발하면서 감대리 근무를 겸했어요.
우선 51대대는 의정부·문산등지로 나가 일선 통신지원을 하게하고 부평의 장비는 시흥으로 후승시켰읍니다.
그런데 6월27일 당??덕총장이 부르더니 미군이 상륙하는데 왜 통신장비를 후송했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당장 가져오라는 거예요.
하는수 없이 교환기·무전기등을 다시 육본으로 가져왔는데 결국은 6월28일 한양교폭마로 모두 망실하고 말았읍니다.
수원으로 후퇴해서는 미군이 공수해온 야전전화선을 약간 지원받기 시작했고, 결사대를 편성, 적지가된 영등포 보세창고를 부수고 전화선을 꺼내왔읍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군통신은 주로 SCR「타이프」의 무전기와 유선으론 지하에 설치한 체신부의 경부간 모단「케이블」을 사용했구요. 우리 제51통신대대는 수원으로 내려온 육본에 즉각 체신부용 교환대를 가져다 설치했는데 낡아서 자주 혼선이 되는 바람에 군수뇌들이 일선연락을 취하다가 공산분자가 통신부대에 있어 통화방해를 하는게 아니냐고 대노, 통신감대리인 나를 인책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어요. 이 문제로 나는 권총을 빼들고 헌병사령관과 다투기도했어요.
대전서부터는 정력환통신감이 귀국해서육본통신감실을 지휘하고 나는 제51대대만을 지휘했읍니다.

<「마이크로웨이브」시설도 갖춰>
육본이 부산까지 후퇴했을무렵 51대대의 창고중대와 정비중대가 합쳐 육본직할의 공창중대가 창설됐어요.
공창중대는 영천·경주에 주둔하면서 전방 통신보급지원을 전담했읍니다.
그리고 1군단과 2군단에도 각기 통신중대가 창설되고 우리 51대대는 낙동강전선의 일선.통신지원과 부산에서 재개하는 통신학교의 장비및 시설일체를 지원해줬읍니다.
9·28수복후 서울로 올라온 우리 51통신대대는 해체되면서 제61통신대대·제62통신근무대대·제71통신가설대대의 창설에 기간이됐습니다. 그리고 나는 제3군단통신참모로 나가 현리전투를 치렀어요. 당시 3군단은 통신시설을 중심으로 군단CP를 이동했는데 이같은 일은 다른부대에서는 거의 볼수 없었지요. 그래서 군단 작전참모는 CP이동시에는 늘 통신참모인 나와 상의를 했어요. 군단 전화선은 하진부리-유천-오대산-광원리-방비산-현리로 이어져있었는데 창촌으로 적이 들어와 퇴로를 차단당한채 전방이 완전히 무너졌을때에드 통신만은 계속 통하고 있었어요.
뿐만아니라 제3·제9사단은 통신시설을 따라서 빠져나왔는데 그때의 전화선은 후퇴시의 나침반구실을 했던거예요.
3군단이 해체된후 나는 보병학교로 갔다가 일선부대장을 계속하고 56년 통신감이 됐읍니다.
통신감으로 있으면서는 신장비교체 5개년계획을 세워 「마이크로웨이브」등을 시설하고 소년통신병 제도를 창설했으며 창군이래의 망실통신장비를 정리하기도했읍니다.>
◆주요일지(1952년12월9일∼12일)
※9일▲영남일대에 대포설 ▲방한마친 「아이크」, 「헬레나」함상회담계속▲태국경찰, 백여명의 공산당 체포
※10일▲휴전회담 공산측대표, 포로취급을 「유엔」군사에 항의▲「마틴」하원공화당지도자, 일본재군비주장
※11일▲「트루먼」대통령, 「아이크」와「맥아더」원사의 「뉴요크」회담비난
※12일▲신편한국군 2개사단전투 참가▲북평방송, B-29가 안동폭격했다고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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