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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한국관을 바로 잡는다|일본서 간행된 『일본 문화와 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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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 문화의 일본 전파 문제는 나량 「아스까」의 고송총 벽화 발견으로 불러일으킨 새로운 관심사. 그런 한·일간의 역사적 문학 교류의 자취를 더듬어 본 『일본 문화와 조선』이란 매우 긍정적인 책자가 최근 일본에서 간행됐다. 김달수 정귀문씨 등 한국인 2명을 포함 25명의 필진에 의하여 각기 다른 문제들을 다툰 이 책은 신인물 주래사 발행으로 사육판 3백여 면에 25편의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내용 목차를 보면 「우리들의 역사를 위하여」 (아부지이) 「고대 조선 도래인을 찾아서」 (수야명선) 「역사의 교훈」 (김달수) 「백합 한줄기」(강부이부자) 「일본 민예미와 이조」 (정귀문) 「소아씨의 출신에 관하여」 (문협정이) 「왕인과 백제왕씨」(추원준언) 「석상신궁과 칠지도」 (상전정소) 「만엽집의 외래 씨족」(중서진) 「도래한 신들」 (중천우의) 「천녀 전설의 도래와 이동」 (정야천결) 「섭진국 백제 사고」(등택일부) 「화사 씨족과 고대 회화」 (직목효차랑) 「음악으로 본 고대 일본과 조선」(전변상웅) 「차의 기원과 전래」 (송하지) 「동양 외과 의학의 시조」 (동평개) 「일본 근세 유학과 강항」 (하부길웅) 「경도의 전통 산업으로 본 조선」 (소판철인) 「우창항에 전하는 조선 춤」 (서천굉) 「고려척과 조리제」 (추산일출웅) 「행기의 발자취」 (지전신웅) 「조선인가도」 (강전정사) 「조선 어원의 일본 지명」 (우좌미임) 「무장야에 있어서의 조선 문화」 (비기일삼랑) 「비전 내의 조선 문화」 (야촌증일) 등.
이러한 글들은 일본에 있는 조선 문화사가 발간하는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에 4년간에 걸쳐 게재된 것들이다.
한국에서 건너간 문화의 잔재를 규명하는 이들 글은 일본에 있어서 명치 유신 이후의 강요된 역사관과 교육으로 말미암아 그르친 한국관을 바로잡기 위한 것.
고송총 벽화 양식의 논의에서도 한반도를 건너 뛰어 중국과 직결시키려는 일본 학계의 고식적인 아집이 드러났지만, 이번 「고대 조선 도래인을 찾아서」에서도 「광사원」을 비롯해 숱한 관광 안내서에 이르기까지 사실을 그릇 해석하거나 기록한 예를 열거하고 있다.
5세기초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여 일본 문학의 시조가 된 왕인, 6·7세기께 일본국의 형성기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한 씨족인 소아씨 등은 본시 백제 사람이다.
그밖에도 삼국에서 건너간 무수한 사람과 그 후예들이 정치·문학·산업의 각 분야에서 일본 문화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이다.
일본에서 국보적 자수유물인 「천수국신장」 (6세기말∼7세기초)의 밑그림을 그린 동한 말현은 백제인이고 또 고려가서일은 고구려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7세기말부터 처음으로 조정에 화공사가 설치돼 화부라는 고급 한 기술자를 채용해 보호했다. 정창원 문서에 의하면 8세기 중엽에 황문이란 성씨의 화사가 보이며 그는 본시 고구려계의 사람으로 그 자손 역시 오랜 기간 조정에서 화업을 계승하였다.
그밖에 8세기 후반에 있어서 화사 씨족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우녹 화사는 출신이 분명치 않지만, 하내 화사는 백제계의 이주민이 모여 살던 하내 국단 비군 출신, 고려 학사는 성씨 그대로 고구려에서 이주해 온 씨족이다. 책진 화사는 한국에서 온 진 계통의 씨족, 양덕 화사 역시 그러한 이주 씨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책진이 신라 이주민이라고 한다면 고대 삼국으로부터 회화 기술이 전해짐으로써 고대 일본 회화의 기틀이 잡혔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송총 벽화도 그 기초 위에서 이룩된 것인 만큼 고구려계의 화사를 특히 강조하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화사 씨족과 고대 회화」의 요지이다.
음악 면에서 한국 문화의 전파를 입증하는 것은 화금 (왜금)이다. 신악이나 제사에 쓰이는 이 악기는 종래 『일본 고대의 특유한 악기』라 설명돼 있지만 그러나 그 구조와 탄주법으로 보아 한국 전래 악기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즉 왜금은 동의 길이가 1m반이고 현이 6줄이며 바른 손으로 용두 쪽을 뜯는 점 등 한국의 거문고 (현금)과 똑같다.
그런데 일본 고대의 금은 등려 유적 발굴품이나, 관동 지방 출토 토기의 것이나 모두 작고 (길이 수십 ㎝) 현도 한 개의 구멍에서 5줄이 방사상으로 걸려 있으며 바른 손가락으로 뜯게 돼 이른바 지금 전하는 왜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국의 거문고는 왕산악이 고래의 고구려 금 (6줄)을 대폭 개량해 10수개의 괘를 세웠다고 하는데, 왕산악 개량 이전의 고금이 바로 왜금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일본어로 금을 「고도」라고 하는데, 고구려의 옛말에서도 「곳」이라 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이다.
8세기초에 설치된 아악료의 외래 음악 악사를 보면 고려·백제·신라·당의 악사로 돼 있음을 알 수 있고 10세기에는 나량 (박씨 성) 대판 (진씨 성) 경도 (다=풍=풍원 및 안배·산정 등)의 3개소에 악사 「그룹」이 조직된다. 이들 성씨는 곧 외래 이주민의 거주 지명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되며 특히 경도에 거주하는 악사는 한반도의 이주민으로서 왕실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동양 정신의 진수라 일컫는 차가 일본에서 독특한 문화로 발전되기에 앞서 그 전래 경로는 한반도와 연결된다. 한국에서의 차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며 불교와 더불어 고려 시대에 전성을 이루었다. 따라서 일본에 차가 전래한 것은 불교 전래 이후라 하겠으며 특히 일본 각지에서 고래의 차 산지가 이주민 (귀화인)의 분포와 매우 일치하는 사실은 주목되는 것이다.
또 일본 의학에서 내과의 시조를 따진다면 중국의 황제·신농의 한방약에 소급되겠으나 외과의 시조는 대체로 한국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왕인 박사에 의하여 문자가 시작되고 8세기초에는 의료 제도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701년의 대보율령에 따른 대학의 학생에는 의생·침생·안마생·주금생·여의·약원생이 있으며 그 강습 과목에 따라 물리적 요법의 외과가 내과로부터 독립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의사가 초빙된 것은 414년 신라에서 온 김무가 최초이며 그후 백제에 양의를 요청하고 있을 때 고구려에서 덕래가 왔다고 한다. 그후 당의방이 수입되기까지 적어도 2백년간은 한의학 시대였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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