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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만든 판 8개가 고려 원판보다 더 ‘귀한 몸’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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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경판 개수는 조사 시기마다 다르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엔 8만1258장, 1955년엔 8만1137장, 1975년 조사에선 8만1240장이다. 해인사 홈페이지에는 8만1258장으로 돼 있다. 해인사 관계자는 “최근 왜 이렇게 수가 각각 다르냐는 민원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것이 해인사가 2012년 7월부터 중복판 조사를 시작한 이유다. 13세기 재조대장경이 새겨진 이후 정밀조사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문화재청으로부터 약 1억3000만원의 지원을 받은 조사 결과 중복판이 지금까지 알려진 108장이 아닌 205장인 것으로 집계됐다. 시기별로 보면 고려 초기 91장,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 79장, 1915년 18장, 1977~2007년 17장에 이른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13세기 중엽 고려 고종 때 만들어진 초기 원판이 후대판에 밀려 중복판으로 분류된 사례는 49건에 이른다. 고려 말 보각판을 원판으로 삼은 경우가 13건, 조선시대 보각판을 원판으로 삼은 경우가 30건, 심지어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만들어진 보각판이 원판이 된 경우도 8건이나 된다(두 건은 원판을 두 개 지정).

 중복판의 문제는 국보로 지정된 일제 강점기 1934년과 62년 12월 국보 재지정 때 모두 등장하지 않았다. 이를 처음 제기한 이는 경북대 서수생 명예교수다. 그는 75년 조사를 시작해 77년에 보고서를 내면서 92개 중복판이 있다고 밝혔다. 중복판이 발생한 이유로 “과거 대장경을 인경할 때 경이 너무 많아 그 판을 찾지 못하고 결판으로 처리한 뒤 다시 새겨 이중이 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편으론 관리 부실의 의혹이 제기된다. 1999~2007년 정부 주도의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이 있었다. 그때 조사에선 205개란 수치가 안 나왔다. 그래서 당시 조사 부실로 추정할 수 있다. 그때의 수리 보고서는 “마구리 몇 장을 수리했고 먹을 제거했다”는 정도며 중복판을 정밀 분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눈으로만 봐도 다른데’ 알아보지 못한 경우도 있다. 가장 많이 훼손된 대반야바라밀다경 162권 1, 2장은 원판인데도 중복판으로 분류됐다. ‘가짜 원판’은 경판 글자 행간에 두 줄로 궤선이 그어져 있어 고려시대 것이 아님을 ‘척 보면’ 알 수 있는데도 구별이 안 됐다. 해인사 관계자는 “전문가들이 없어 더 깨끗해 보기 좋다는 이유로 판의 운명이 달라진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모두 ‘꼼꼼하고 깐깐하게 조사해 분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중복판’으로 분류된 대반야바라밀다경 31권 26, 27장의 경우 뒷면에 “고려 국왕 고종의 명을 받들어 정유년(1237, 고종 24)에 제작됐다”고 기록돼 있다. 반면에 ‘원판’으로 지정된 경판은 왼쪽 아래에 ‘다이쇼(大正) 4년(四年) 조각’이라고 돼 있다. 다이쇼 4년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으로 데라우치 총독 당시 보각된 판이라는 뜻이다. 한자도 하나 제대로 읽지 않고 분류했다는 뜻이다.

 분류가 왜 이렇게 잘못됐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해인사 관계자는 “대장경은 1934년 8월 조선총독부가 국보 제32호로 지정했고, 해방 후 1962년 12월 재지정했는데 당시 어떤 경판이 있는지 리스트도 없었고, 이후 제대로 된 조사를 한 적이 없다”며 “중복판의 경우는 이번에 첫 조사로 알 수 있었지만 개별 경판의 제조·수정에 관한 역사도 기록돼 있지 않아 대장경의 모든 중복 리스트는 전수조사를 해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복판을 마구 취급하진 않고 판전에 원본과 함께 보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보가 아니라서 언제든 훼손의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실제로 숭례문 소실, 숭례문 부실 복구보다는 덜하지만 본질적으론 같은 행위가 발생했음을 보고서는 보여준다.

원본 훼손
잘못된 분류는 국보급 문화재의 훼손으로 이어졌다. 서수생 교수의 77년 보고서에 따르면 중복판 중 대반야바라밀다경 67권 3장과 9, 10장 두 개 경판에만 잘린 흔적이 나온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는 14개로 늘어났다. 77년부터 2013년 사이에 고려시대 경판 12개가 새로 훼손된 것이다.

 훼손이 가장 심각한 판은 대반야바라밀다경 제31권 26, 27장과 162권 1, 2장이 담긴 두 개의 판이다. 이 두 개는 경판의 네 모서리가 모두 톱으로 수직 절단된 상태다. 모서리에 새겨진 글자 두세 줄, 10~20여 자도 통째로 잘려나갔다. 판을 보호하는 옻칠도 거의 벗겨진 상태라 절단된 부분이 마모되면서 네모난 경판 모서리가 둥글게 변했다. 대반야바라밀다경 106권 5, 6장이 담긴 판은 네 모서리 중 세 곳이 훼손됐다. 경판의 아랫부분 글자 두 줄은 비스듬히 잘려나갔다.

 대반야바라밀다경 38권 8장은 오른쪽 상단 글자를 두 글자씩 두 줄로 네 개, 오른쪽 하단은 세 글자씩 두 줄로 여섯 개를 정교하고 반듯하게 잘라냈다. 자른 단면에는 목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수리 목적일 경우 경판 목재가 상하지 않도록 하는 옻칠 등 추가 처리를 하는데 이 경우는 수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왼쪽 하단에도 세 글자를 도려냈는데 역시 보존 처리를 따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왜 대장경판을 잘랐을까. 대장경판의 훼손 과정은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팔만대장경은 경남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 보관돼 있어 일반인에겐 공개되지 않는다. 연구나 수리 목적으로 대장경을 열람할 경우 해인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대장경을 수리할 경우에도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 수리 기능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문화재보호법은 “국가지정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변경 사항 등에 관한 기록을 작성·보존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장경판이 톱질된 시기와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이번 조사를 맡은 이관섭(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팔만대장경 전문연구위원은 “67권 3장과 9, 10장은 수리를 위해 자른 흔적이 남아 있는데 나머지 경판은 대부분 수리 흔적 없이 톱질 자국만 남아 있다”며 “톱질 자국이 성긴 것으로 봐서 수리·보존을 목적으로 자른 건 아닌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해인사 관계자는 “2006년 수리 과정에서 발생한 일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수리 작업을 하는데 “고친 게 더 나쁘다”는 의견이 있어 논의 끝에 작업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대장경판 중복판의 훼손은 문화재보호법상 위반 행위가 있는지 수사해야 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불량 수리
팔만대장경 수리·보존 단계에서 경판을 깨거나 글자를 지워버리는 등 오히려 훼손하고 있는 사례가 많았다.

 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1011~31) 처음 만들어졌으나 불에 타 소실됐다. 그 직후 대장경을 다시 새겼는데 이 판본을 재조대장경이라 부른다. 우왕 재임기(1374~88)에 이 판본을 인쇄해 일본에 선물한 것이 오타니 대학에 있는 인경본인데, 이것을 저본(底本)으로 두고 비교하여 원판 분류의 근거로 삼아 수리보존을 하고 있다.

 대반야바라밀다경 53권의 경우 수리는 했으나 글자체를 정확하게 새기지 못했다. 원판의 대부분이 마모된 대승광백론석론 4권 15장은 새롭게 글자를 새겨넣었어야 하는데 그냥 공백으로 방치된 상태다. 대반야바라밀다경 2권 21, 22장의 2007년 사진과 2013년 사진을 비교해 보면 마구리(경판 양옆 손잡이 부분)의 경첩을 박으면서 좌우 경판까지 쪼개진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마구리 부분은 경첩 작업 미숙으로 썩어들어가기까지 했다.

 또 대반야바라밀다경 7권 4장은 수리하면서 왼쪽 아래 ‘상(尙)’자를 아예 지워버렸다. 또 왼쪽의 ‘제(諸)’자도 윗부분이 잘려나갔다. 제대로 된 수리라면 이 부분을 오타니 인경본을 참고해 글자를 새겨 복원했어야 했다.

 대반야바라밀다경 28권 11, 12장의 경우 오른쪽 아랫부분은 완전히 들어내고 왼쪽 윗부분도 깎아냈다. 같은 경 73권 2장은 오른쪽을 수리해야 했는데 세 글자만 새기고 공백으로 남겼다.

 마구리 보수에 사용된 목재도 경판과 재질이 다른 소나무로 돼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위원은 금속 장석(마구리 네 귀퉁이에 박는 구리장식) 작업과 관련해 “못과 장석은 원래의 것과 두께와 모양이 다르다. 고증 없이 만든 것 같다”며 “그런데도 담당인 합천군청은 그런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이 위원은 “하지만 그런 기술은 존재한다. 금속 성분은 분석하면 되고, 두께와 모양을 살려 그 위치에 정확히 수리하면 되는데 적당히 수리·복원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별 취재팀=안성규·조용철·정형모·류정화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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