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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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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

-김지하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했다. 그런데 바른 입을 가지고도 비뚤어진 소리를 해야 탈이 없던 시대를 우리는 부끄럽게 살아왔다. 시가 있으되 권력의 가슴에 붓끝을 비수처럼 갈아 들이대지 못하던 서슬 퍼렇던 때 시인으로 태어난 지 돌도 안되는 간난애 시인 김지하가 5.16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에 시 '오적(五賊)'을 장전해 그들의 심장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김지하는 1941년 전남 목포시 대안동에서 전기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본명은 영일(英一)이고 글을 쓰면서 지하(芝河)라는 필명을 쓰게 된다. 목포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원주중학으로 전학하면서 성당에 나가게 되어 지학순 주교를 만난다.

서울 중동고에 진학, 백일장에서 입상, 소월.영랑.미당의 시를 외며 시의 길로 들어선다. 서울대 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4.19직후인 60년 5월 판문점 남북학생회담 대표 3인의 한명으로 뽑히기도 한다. 5.16으로 통일촉진운동은 꺾이고 김지하는 주동자로 쫓기게 된다.

'서울대 6.3 한.일굴욕회담 반대학생연합회'소속으로 선언문들을 발표해 김지하는 체포.구금됐다가 넉달 만에 풀려난다. 이런 수난 끝에 66년 8월 입학 7년반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는다. 그러나 다시 지명수배가 되자 탄광에 들어가 일하다 폐결핵을 얻어 서대문병원에 입원한다.

이 끝없는 저항과 도피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피를 토하듯 시를 썼고 이 시들을 읽은 문학평론가 김현은 '시인'을 편집하던 조태일에게 넘긴다. 조태일이 가난하게 꾸미던 월간 '시인'의 편집위원은 조태일.이탄.이근배 세 사람이었다.

'사상계' 편집장 김승균은 70년 5월호를 5.16특집으로 꾸미면서 세간에 떠도는 '오적촌'을 주제로 김지하에게 시를 청탁한다. 오적촌은 정치를 잘해보겠다고 나선 군인들이 권력을 잡은 뒤에 초호화 저택을 짓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도둑질을 하지 않고서야 서민들로는 꿈도 못 꾸는 별세계인 것이다. 김승균은 대학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함께 한 김지하의 필력을 믿었고 김지하는 사흘 만에 3백행이 넘는 장시를 담시(譚詩)로 써낸다.

학생 때부터 조동일 등과 판소리.민요 같은 전통 시가에 빠져 있었고 더욱 골계(滑稽)에 몰두했던 김지하는 그러잖아도 "저 싸가지 없는 놈들"하고 혼내주고 싶었던 차에 판소리 가락을 빌려 담시라는 형식에 착안, 거침없이 붓을 휘달린다.

'오적'을 미처 못 읽은 나는 우연찮게 청구동에 갔다가 정계 은퇴로 핍박 받고 있던 운정(雲庭)김종필이 들고 나온 '사상계'를 보고야 알았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5월 그믐께 김승옥.김현.김지하가 내 사무실에 찾아와 술자리를 같이 했는데 며칠 뒤인 6월 3일 김지하는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한' 반공법 위반으로 긴급 체포된다.

한 시대를 들었다 놓은 김지하의 풍자와 해학, 시대를 꾸짖는 불호령이 아니었더면 이땅의 시는 어떻게 고개를 들었을까.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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