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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많음을 부끄러워하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무데라도 좋다. 높고 먼 어느 산 속에서 마치 사고라도 난 것처럼 눈 속에 묻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새해를 맞았다.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생각이 그지없이 평화로웠다. 비행기 속에서 내다보는 구름바다처럼 그것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넘쳐있었다. 안기기만 하면 이내 잠들 것 같았던 그 구름들의 촉감만큼이나 포근한 것이기도 했다.
올해 새해아침 따라 왜 그랬을까. 몇 곳 세배를 다니며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때묻어져가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더러운 것이라는 느낌이 내 속에서 절실해진 때문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모골이 송연해 졌다.
순간 나는 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한동안 목욕을 거른 사람처럼 그저 아무데고 긁고 싶어졌다. 절을 할 때나 인사를 주고 받을 때도 늘 안절부절이었다. 손가락 끝이 늘 불안했다.
「삶의 목욕」을, 「삶의세척」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용케 살았다는 생각은 참 희한한 것이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 철이 든 기분이었다. 사실 내 삶에서 그것은 가장 절실한 「첫 철」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다는 것이 워낙 삶의 먼지를 더하는 것이고 삶의 때를 더 묻혀 간다는 것이기도 하리라. 하지만 기왕에 든 첫 철이니 새해부턴 그 철을 살려가리라 마음먹고 있다.
종류도 하고 많은 그 거리의 「탕」들에서 때를 씻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옛날 뜻높았던 어느 선비처럼 방갓으로 머리를 가릴 수도 없다. 언제나 호주머니 속에 소금을 넣고 다녀볼까 하고 궁리도 해 보았다.
하지만 더러운 꼴 당할 때마다 침 세 번 뱉고 소금을 뿌리자는 그 속셈인들 무엇에 쓰겠는가.
『푸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맑디 맑은 윤동주 아닌 바에 그 맹세는 주제넘은 일이다. 오직 거울을 들여다보며 부끄러움 많은 얼굴을 붉혀볼 밖에…. 새해엔 그렇게 살 생각이다. 부끄러움 많음을 부끄러워하는 것 밖에 달리 더 길이 없을 때 나는 정말 이 겨울 가기 전에 눈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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