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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중앙문예」당선 희곡|철길(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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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여사 (현호의 팔을 가볍게 흔드는) 아이, 여보!
최덕수 아, 기차시간이 멀었는데 역전에서 천천히 저녁요기나 하고들어올 것이지, 개찰도 않는데 맘대로 역구내를 들락거리면 어쩌자는게야, 엉?
마주 보는 현호와 정여사, 약간 어리둥절해진다,
최덕수 (응답이 없자 화가 난) 무임승차를 할 작정이야? 나가라구, 나가요. (둘을 떠다민다)
비켜서려던 현호, 훔칫 놀란다. 현호뒤로 몸을 숨기는 정여사.
현호 저…, (믿기지 않는 듯 주춤 거린다) 저….
최덕수 아, 어서 나가라니까. (손으로 가리키는) 저기, 대합실에 나가면 의자들이 많으니 앉아서 기다리라구.
현호 (미처 판단을 못한채) 저…아저씨, 혹시 저….
정여사 여보, 왜 그러세요!
최덕수 허, 허. (짜증이 난다) 이 사람들이, 이거.
현호 (와락 손이라도 잡을둣) 아저씨, 저, 몰라보시겠읍니까? 저예요 현호, 저, 김현홉니다.
현호의 기세에 눌린 최덕수, 몇발짝 뒷걸음친다.
정여사 여보.
현호 (따라 붙는) 아저씨, 김현호라니까요. 제가, 제가 창일이 하고 단짝이던 현호예요.
최덕수 …? (충격을 받는듯 몸을 떤다) 뭐야?
현호 (열심히) 개울건너 김약국집 아시죠? 제가 바로 김약국아들인….
최덕수(간신히 현호를 본다) 창일이…?
현호 네, 제가 바로 창일이 하고… 기억나시죠, 아저씨.
멀건히 현호를 건너다 보는 최덕수,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현호 (이상한 느낌) 아저씨, 저…. 도망치둣 현호로부터 멀어지는 최덕수, 획 몸을 돌려 현호를 본다. 최덕수 (중얼거리는) 창일이, 그녀석…
(갑자기 큰) 창일이가 어떻게 됐다구?
현호 아저씨!
정여사 (다가가려는 현호의 팔을 잡으며) 여보.
정여사와 최덕수를 번갈아 보는 현호, 혼란해진다.
최덕수 (신음하듯) 창일이… 창일이가. (허둥댄다. 그 전신에 고통이 밀려오듯)
이때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덮어누르듯 들려온다. 그 소리 점점 커지며 고통을 이기려고 허둥대는 최덕수.
-무대, 캄캄해진다.
기적소리 멀리 사라진다.
무대 좌수에 말쑥한 철도원복차림의 창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신발끈을 매고 있다.
최덕수 (소리만) 서두르지 않고 뭘하냐, 넌?
창일 (허리펴며) 지금 막 나갈 참이어요.
최덕수 (조명 속으로 들어선다) 꾀 피우지 말고 근무 열심히해야한다.
창일 네.
최덕수 첫부임이니까, 일이 익숙지 않아 힙은 좀 들겠다만, 곧 괜챦아져. (대견한듯 아들의 아래 위를 훑어본다) 몸조심허구! 창일 자주 편지 할게요.
최덕수 편진? 임마, 하루 한번씩 급행열차를 타구 이 앞을 지나다닐텐데 편진 무슨놈의 편지야? 창일 (멋적은) 하긴 그렇군요.
최덕수 어서 가봐. 첫 부임이 경의선 특별급행 차장자리가 쉽지않다는것만 알구.
창일 아버지두, 제가 어디 차장인가요? 차장보조원이죠.
최덕수 아,임마 그게 그거지. 이제 곧 차장이 된다구. 근무만 열심히하면 넌 이제 차장이구, 역장이구 다 할 수 있는 게야. 금테모자라구, 금테모자.
창일 …. (고개 떨어뜨린다)
최덕수 (조용히) 알았냐? 너.
창일 네.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버지
최덕수 그래, 어서 가 봐.
창일 네. 그럼…. (모자 벗고 절한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 끄덕이는 최덕수.
창일이 조명 밖으로 사라진다.
-이때 다시 증기기관차의 요란한 바퀴소리와 함께 무대 어두워진다. 어둠속에 기적소리만 드높고 무대 천천히 밝아진다.
무대 한가운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선 최덕수.
기관차 소리가 꼬리를 감춘다. 현호가 정여사에게 잡힌 팔을 풀고 최덕수에 가려한다.
정여사 아이, 여보.
후닥닥 고개를 돌려 둘을 보는 최덕수, 그는 벌써 지금까지의 상념을 잊어버리고 있다.
현호 (다가가며) 아저씨.
최먹수 아, 잠깐만 기다려요. (손을 내젓고 회중시계를 꺼내본다) 이제 곧 기차가 들어올게요.
약간 의기소침해진채 시그널 체인지 레버가 있는 곳으로 가는 최덕수.
현호…. (납득이 가지않는다)
정여사 여보. (다가와 최덕수를 본다) 이상하잖아요?
현호 (최덕수를 지켜본채) 내가 얘기했었지, 창일이 최창일이라구,어릴때 함께 자랐다는 그 친구. 저분이 바로 창일이 아버님이야. 정여사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 여길….
현호 알수 없군. (잠깐 생각에 빠진다) 쭉 여기 사셨는지, 아니면 우리처럼 민통선이 풀려 오늘 성묘를 오신건지….
정여사 하지만,성묘하러 들르신 분같지는 않잖아요.
현호 그러게말야!
그사이, 최덕수는 넘어진 레버를 일으켜 세우려 애쓴다.
정여사 (조심스레)약간 돈 사람같아요.
현호 (나무라는) 여보!
최덕수 (레버가 말을 안 듣자 현호를 돌아다 본다) 그, 거기 있는 양반.
현호 아,네.
최덕수 이것 좀 거들어줬으면 좋겠구먼. (례버를 툭툭친다) 이녀석이 꼼짝을 않는단 말씀야.
현호 그러죠. (급히 다가간다)
최덕수 (혼잣말처럼) 간밤에 또 동리 꼬마녀석들이 장난질을 한게야. 우리 역엔 울타리가 없으니 그게 탈이거든.
현호 울타린 원래 없었죠?
최덕수 글쎄,그렇다니까. 내가 이 역에서 일한지 사십…(손가락을 셈해본다) 그렇군. 사십삼년째야. 그동안 여러수백번은 더 울타리를 해야한다구 얘길했는데두….
현호 (레버를 당기려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역은 대개 울타리가 없더군요.
최덕수 (거스른다) 무슨소릴… 역이 작다구 울타리가 없으란 법은 없잖소?
현호 그야….
최덕수 자,자, 기차가 들어올 시간이라구. 아,제 아무리 급행열차라두 신호등이 빨간불이면 이역을 지나갈 수가 없는게야. 둘 힘을 합해 레버를 당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레버.
정여사, 불안하게 이들을 보고있다.
최덕수 (허리를 펴며)그,이상하군.
오늘은 하루종일 신호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단 말씀야!
현호 그래도 아저씨가 계시니까 기차들은 무사히 오갈 수가 있을거예요.
최덕수 (힐끗 내려다 본다. 자기 를 알아줘서 만족하다) 암, 그야 그렇긴 하지만 헛….
이때 개찰구를 통해 플랫폼으로 나으려는 노인과 그의 부축을 받는 노파.
노인 그 조심하라구, 넘어지셨어.
노파 에이그, 영감이나 조심혀.
남 걱정 마시구.
최덕수 (허리를 굽히려다 이들을 본다) 안돼! (급히 개스등을 들고 달려나으며) 개찰도 하지않구 누구 맘대루 들어오랬어!
노인 (주춤 물러선다. 노파와 최덕수를 번갈아 본다) 개찰이라니?그게 웬 소린가?
최덕수 기차를 타려면 표를 사서 개찰을 하구 들어와얄 것 아뇨, 안 그렇소?
노파 (펄쩍 뛰듯)기차라니? 아니 그럼 여기서 기차를 탈수 있단 말이우, 응?
최먹수 (어이없다) 허, 허, 이사람들 돌았군. 여긴 기차역이요, 기차역!(개스등을 두사람 눈앞에 마구 gms든다)
노인 (몸을 피하며) 아, 아, 저리 비키시우. 거 별사람 다 보겠군.(노파를 데리고 들어가려한다)
최덕수 (와락 노인을 떠다밀며) 그냥은 안된대두!
노인 허,허….
정여사가 현호께 이들을 말리라고 귀엣말을 한다.
노파 여보시우, 아까 기차를 타려면 어쩌구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최덕수 글쎄, 기차를 타려면 차표를 사래지 않소.
노파 (놀란다)예, 예? (노인을 쳐다본다)
현호 (끼어들며) 저, 아저씨, 이분들은 기차를 타려구 오신 분들이 아니구요, 마중을 나으신 분들 같군요.
최덕수 마중? 마중이라면, 어디서 오는 기차를 기다리겠다는게야?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하며 노인의 턱밑에 얼굴을 디민다)
노인….(얼굴을 찡그리며 불러선다)
노파 (와락 최덕수를 잡으며) 여보, 평양에서두 기차가 오우?
현호 (재빨리) 자, 자, 들어가시죠. 들어가세요. (노파를 풀랫폼으로 들여보낸다)
노인 이거 원… 도깨비한데 흘린것 같군. 헛…. (성큼성큼 들어선다)
약간 멍청한 표정으로 이들을 보는 최덕수, 곧 그 기분이 침울해진다. 노인은 곧장 플랫폼 끝까지 걸어가 철로를 내려다본다. 끌리듯 그는 북쪽 하늘을 건너다본다.
정여사 (노파께 다가가) 고향이 이 부근이신가 보군요?
노파 (사이, 노인을 본다. 고개 젓는다) 아니라우.
정여사 그럼.
노파 집은 사리원인데…. (턱으로 노인을 가리키며) 저 양반이 자꾸 조르는 바람에 예까지 나왔다우.
정여사 네에…. (고개 끄덕인다) 이때 최덕수가 못마땅한 열굴로 네사람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노인이 선 반대방향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간다.
현호 (따라가며) 아저씨, 어딜 가시려구…?
최덕수 (돌아보지도 않고) 선로를 보러가는게야, 왜? (퇴장)
현호, 따라갈까 어쩔까 망실인다.
정여사 여보,그만 돌아가요,늦겠어요.
현호 가,가만 있어 봐. (최덕수가 나간 쪽을 살핀다)
노파 댁에서두 고향을 찾는게요?
정여사 네, 여기가 저희 고향이예요. 이십몇년만에 처음 성묘를 하러….
노파 (고개 끄덕인다. 힘없는) 원을 풀었구료.
정여사 (가벼운 한숨) 네, 정말 저인 자나깨나….
노파 에휴, 집구석에 콱 처박혀 있을걸 괜히 나와서 우린 마음만 심란해졌다우. (풀랫폼에 주저앉는다)
노인 (시선을 그냥 둔채) 임자!
노파 (불쑥) 왜 그러우, 또….
노인 (철길을 내려다본다) 이 철길을 따라 곧장 가면 사리원에 닿을수 있겠지?
노파 (못들은척 외면해버린다) ….
정여사와 현호, 이들의 마음이 전해오는 듯 무겁게 침묵하고 섰다.
노인 (돌아다본다) 안 그런가?
노파 (억지로) 기차가 다닌다면야 그야 이를 말이우?
노인(다시 시선이 떨어진다) 글쎄,이 철길만 따라가면 사리원 우리집에 닿을 수 있을게 아닌가?
노파 (아프다, 눈물이 솟으려 한다) 영감두 별‥·.
노인(불쑥 하늘을 본다)안 그런가?
노파 모르겠수 난 (손수건으로 코를 푼다.짐짓 힘껏!)
노인 (안타깝게) 아, 안 그런가? 노파 (할수없이) 하지만 철길이 끊기지 않았수?
노인 (후딱 돌아다 본다) 뭐?
철길이 끊겨? (하다, 곧) 하긴 그야 그렇지,(자신에게 다짐하듯) 철길이 끊켰지.
무대,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채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이때 최덕수가 다시 등장, 네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채 회중시계를 꺼내보며 개찰구로 해서 사무실로 들어간다.
노파 (이윽고) 여보, 이젠 그만 서울로 돌아갑시다. (사이) 아, 그렇게 보구섰다구 기차가 오는것두, 걸어서 갈수 있는 것두 아니쟎우? (무겁게 한숨 쉰다) 차라리 집구석에 들어앉아 아무생각두 않는게 맘 편하다우.
최덕수는 사무실에 들어서자 전학통 앞으로 간다. 개스등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려다 잡히지않자, 문득 빈손을 내려다 본다 .대롱대롱 매달린 수화기를 보자 혼자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귀에다 가져간다. 전학통의 핸들을 들리는 최덕수, 잘 돌지않는 핸들을 되풀이하여 돌린다.
노인 (문득) 임자, 우리 저기까지만 걸어가보지 않을텐가?
노파 예에?
노인 (자신도 모르게 끌려드는) 저기,저 까지만 나하구 좀 걸어보자꾸.(걸어간다)
노파 (벌떡 일어선다) 아니, 여보, 어딜 가시우?
노인 (정신을 빼앗긴 사람처럼) 응. 저기 까지만 가보려네…. (철길을 따라가듯 퇴장)
노파 어, 여보…. (급히 노인을 따라 퇴장)
현호 그들에게 끌리듯 따라간다. 이를 말없이 잡는 정여사. 마주 보는 둘. 현호가 꺾이듯 부서진 벤치모서리에 걸터앉는다.
정여사 여보…. (가만히 현호의 머리를 가슴에 안아준다)
여전히 핸들을 돌리는 최덕수. 손을 멈추고 신호가 가기를 기다린다.
최덕수 아 구현, 구현역! (전화통을 두들겨 보고)아, 여보세요.구현, 구현! (수화기를 이리저리 들여다본다. 혼잣말) 이녀석들, 이젠 전화마저 받질 않는군, 허.(다시 열심히 핸들을 돌린다)
현호 (고개를 든다) 여보!
정여사…? (아픈 마음을 감추려한다)
현호 우린 그래도 저 노인네들에 비하면 다행스러운 편인가?
정여사 누구?
현호 걸어서라도 집으로 가고픈 저 노인내외. 그리고 창일이 아버지.
정여사(그렇다는 듯 고개 끄덕인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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