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일본 속의 한국 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동경=박동순 특파원】삼국시대 이래 한국에서 만든 동종의 아름다움에 이끌린 한 일본인이 근 60년 동안 이를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일본 안에서만 59개의 조선 종을 찾아 실측·모사·탁본과 사진촬영을 끝냄으로써 그 보고서가 내년 봄쯤 일본에서 출간된다. 그는「고오베」(신호)시에 사는 당년 75세의 「쓰보이」(평정량꾸) 씨.
한국과 일본에 있는 한국제 범종의 상태는 지금까지도 많은 한·일 학자들이 조사해서 소개한바 있으나 숫자로 보면 한국에 있는 것이 80개미만, 일본에 있는 것 20개정도가 정리됐을 뿐이다. 그런데 「쓰보이」씨가 조사 분류해낸 「조선 종」은 한·일 양국을 통틀어 도합 1백 82개(망실 및 소재불명 14개 포함)이며 이밖에 민간 비장의 것과 지뢰탐지기 등을 써서 최초에 발견된 것을 포함하면 현재 2백 개가 넘었으리라는 추산이다. 이 1백 82개 가운데 연대추정이 불가능한 7개를 제외한 1백 75개를 시대별로 보면 ▲주조 연대는 신라=13개 고려=1백 39개 이조=23개이며 ▲소재지별로 보면 한국에 있는 것이 1백 22개(신라 6·고려 93·이조 23), 일본에 55개(신라 7·고려 48), 「프랑스」에 1개(고려)로 돼 있다.
일본에는 이밖에도 4개의 동종이 건너온 기록이 있으며 「쓰보이」씨 때의 조사에서 누락된 일광동조궁의 「조선종」(이조) 등까지 합치면 현존분과 기록 분을 통틀어 일본에만 60개 이상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조선 종」은 한반도에서 주조됐다는 점 이외에 ①종상부의 용누(용을 틀어 종을 매달게된 고리)가 단(?)두이며 그 옆에 장식통(음관)이 달려있고 ②종신에는 상대·하대·유곽 등이 양각돼 있으며 ③몸통에 또 비천불상 등이 부조돼 있는 데에 특징이 있으며, 따라서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만들어졌어도 조선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에 비하면 중국 종과 일본 종은 한결같이 용두가 두 마리이며 따라서 단두의 조선 종은 한반도에서만 볼 수있는 독특한 것이다. 흔히 종은 음·명·모양에 따라 명종 여부를 가름한다. 하지만 음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타음·음량·여운·원음 등의 네 가지 요소가 있고 예컨대 여운의 울림은 10초에 10내지 15회가 제일 좋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봉덕사 신라종(에밀레종)은 소리가 세계 제일(서독 국립박물관장)이며 일찌기 일본의 모 방송국이 세계 각국의 유명한 종소리를 녹음 방송한 인기투표 결과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쓰보이」씨가 특히 우리의 범종에 매혹된 것은 종신에 양각된 비천불상 및 보살상이다. 일본 종에도 후세에 조선 종을 모방, 비천상을 새긴 것이 있으나 비천상의 구도가 정형화돼 있는 편이다. 이에 비해 조선 종의 경우에는 자유분방한 구도에 의해 유려하기 이를 데 없는 비천상을 양각한 것이 천하일품이라고 격찬하고 있다.
「쓰보이」씨에 따르면 일본 소재의 것 중 돈하 상궁신사와 도근현 운수사에 있는 신라종이 일품인데 운수사 종은 그 모양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 동종인 오대산 상원사 종(서기 725년)과 흡사하다고 실측도를 놓고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조선 종들은 일본문화의 여명기에 불상·불경 등과 함께 일본에 처음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실제로 일본의 옛 기록에는 백제왕과 왕비가 일본에 보내주었다는 기사도 남아 있다. 그 후에도 서기1367년의 전래 기록이 있으며 이때부터 14세기 말 까기 왜구 등을 통해 10개가 건너와 지금까지도 5개가 남아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조선 종의 일본 유입은 임진왜란 및 그 전후의 한·일 교류시기이며 한·일 합병 이후에도 많은 숫자가 건너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종의 수명은 대개 1천년. 일본에는 이렇듯 오랜 풍상을 이겨낸 조선 종들이 허다히 남아 있으나 그 중에는 화재와 전시의 폭격 및 금속 공출령 등의 인재에 의해 없어진 것도 많다고 「쓰보이」씨는 애석해하고 있다.
일본에 현존하는 최고의 신라 종은 「호꾸리꾸」(북륙=임란 때 한국침략군의 출항지)지방의 「쓰루가」(돈하) 항에서 8km 쯤 떨어진 바닷가에 세워진 신사에 안치돼 있었다. 일본역사의 중심지인 나량·경도지방에서 최단 「코스」의 동해(일본 해)에 면한 항구도시 돈하시로부터 「택시」로 10여분. 돈하만을 끼고 송림 속을 달리면 오른편에 훤히 트인 백사장이 보이면서 왼편 숲속에 상궁신사의 현판이 보인다. 「상궁신사소지」에 따르면 제신인 상궁대신은 『양별의신』으로 영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함께 모신 신공황후는 이른바 황국사관에 의한 「신라 정벌설」의 주역이며 여기서 처음 복대를 둘러 후에 응신천황을 낳았다해서 해상의 수호신 겸 안산의 신으로 지금까지 숭앙되고 있다. 이같이 어딘가 한반도와의 역사적 인연이 짙게 배어든 고장이다.
이 신라 종은 경내에 신축한 육중한 종고 안에 자리잡고 있다.
오랜 풍상에 녹슬어 이제는 희미해졌으나 『태화7년』(서기833년), 『청주』(진주), 『연지사』등의 명문을 지금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종의 높이 25「인치」, 구경21·5∼22「인치」, 용두는 틀어 올리면서 구슬을 머금고 종신 전후면에 양각된 비천상은 뜬구름을 타고 천의를 펄럭이며 두손을 들어 장고를 치는 모습이다.
이종은 명치 33년(1900년)에 일본의 보배로운 미술공예품으로 지정된 이래 일본 제일의 명종으로 지금도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 동종이 언제 이곳에 전래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