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4) <제자 정인승>|<제29화>조선어학회 사건 (19)|정인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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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표준말의 확립>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으로 우리말의 올바른 표기법은 결정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공통어가 될 표준말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느낀 조선어학회는 1935년1월2일 그 동안 표준 어휘로 수집한 4천여 어휘를 표준어 사정 위원회 제1독회를 열어 사정 위원 40명에게 내어놓았다.
사정 위원회는 교육계 종교계 언론계 남녀별 도별로 구성되었다.
표준말 제정의 원칙은 이미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라는 규정을 짖고 있었으므로 사정 위원 선출도 서울·경기도 출신이 전수의 반, 각 도별로 두 사람씩을 뽑아 40명으로 했다.
온양 온천에서 열린 제1독회는 이희승이 임시 의장이 되어 4일까지 사정 위원 40명 중 32명이 참석, 회의를 거듭하여 사정을 하고 이를 다시 김창제 김윤경 김형기 방종현 신윤국 안재홍 이극로 이기윤 이만규 이숙종 이윤재 이호성 이희승 최현배 한징 홍「애스터」 등 수정 위원 16명을 뽑아 수정을 하도록 했다.
제2독회는 그해 8월에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열렸으며 제3독회는 다음해인 1936년7월 인천 제1공립 보통 학교 대강당에서였다.
세 차례의 독회를 거치는 동안 사정 위원 수도 늘어 73명이 되었다.
나는 제3독회에 참석, 문세영 윤복영 이강동 이극로 이만규 이윤재 이중화 이희승 최현배와 더불어 최종 수정 위원이 되었다.
11인의 최종 수정 위원은 총 5천6백69개 낱말 중에서 3천1개 낱말을 골라 표준어로 정했다.
1936년10월28일 한글 반포 제490돌 기념일 하오 6시 서울 인사동 천향원에서 교육계·종교계·문예계·언론계 명사 1백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글날 축하회와 아울러 사정한 표준말 발표식을 가졌다.
이날 이윤재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 대해 설명했다.
표준말을 고르기 위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도모했다. 사정이 거의 끝났을 때에는 사정안을인쇄하여 각 교육 기관·종교 기관·문필가 및 명사 등 5백여명에 보내어 비평을 구하였다.
그 결과 이 표준말의 사정은 단순히 소수 위원만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된 것이었다.
사전 편찬에 필요한 또 하나의 기초 작업은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이 외래어 표기법 제정은 1931년1월 사일 조선어학회 주최로 각계의 귄위자 45명으로 구성된 「외래어 표기법 및 부수 문제 협의회 의 결의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 그 책임을 맡기로 된 뒤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조선어학회는 책임 위원으로 이희승 정인섭 이극로 3인을 뽑아 이들로 하여금 ①외래어 표기법 ②일본말 소리 표기법 ③우리말 소리의 로마자 표기법 ④우리말 소리의 만국 음성 기호 표기법 등에 대한 초안을 기초하게 했다.
조선어학회는 한편으로 외래어 표기법에 여러 사람의 슬기를 널리 모으기 위해 학회 회원은 물론 「조선 음성 학회」「일본 음성 학회」그리고 멀리 해외에 있는「만국 음성학 협회」「세계 언어학자 대회」「국제 실험 음성 과학 대회」「세계 음운학 대회」등 권위 있는 음성 과학 연구 단체의 의견을 묻고 조언을 받았다.
이때 영국 「런던」 대학 교수 「대니얼·존즈」씨와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 「조슈어·휘트모어」씨 등 세계 여러 나라 저명 학자들이 조언을 보내왔다.
8년 동안 연구와 심의를 거듭한 결과 l938년 가을에 이르러 외래어 표기법, 일본어 음 표기법, 한국 어음 「로마」자 표기법, 한국 어음 만국 음성 기호 표기법에 대한 원안이 만들어졌다.
조선어학회는 이 원안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실험에 붙이기로 하여 2년 동안 학회에서 발간되는 월간 잡지·기타 간행물에 적응해 본 뒤 원안 전문을 동사하여 각계 인사 3백여명에게 보내어 비평과 수정을 받았다.
외래어 표기법은 드디어 10년 만인 1940년6월25일 학회 회원 전원의 일치된 결의로써 안을 확정, 사회에 발표했다.
또 이해 9월9일 당국의 허가를 얻어 인쇄에 붙여 1941년1월15일 조선어학회 대표 이극로를 저작자 겸 발행인으로 하여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이란 책자를 발행했다.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은 10년 동안 참으로 의견도 많고 대립도 많아 서로 엇갈리기도했다.
그러나 당시 연희 전문 학교 교수였던 정인섭, 조선어학회 대표 간사 이극로, 이화여자 전문 학교 교수 이희승 등 3명의 책임 위원을 비롯 이중화·최현배 그리고 당시 보성 전문 학교 교수였던 함병업, 연희 전문 교수 김선기 및 나까지 다섯이서 심의를 거듭, 겨우 완성한 것이었다.
한편 동아일보사 부사장 장덕수, 매일 신보사 학예 부장 조용만, 조선일보사 출판부 주임 성대훈, 「고오베」「브라질」 총영사관 서기 문창준 등의 협조도 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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