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일본서 돌아온 신라 인면문 기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난 10월14일 일본의 「다나까」(전중민신)씨가 경주에 기증한 신라 때의 인면문 막새기와는 너무 귀한 것인 까닭에 두고두고 회수에 노력한 보람이다. 사실적이면서 매우 예쁘장하게 부각된 이 인면문 기와는 당초 1934년 경주흥륜사 터에서 농부가 주운 것인데 곧 고물상인을 거쳐 당시 공의였던 일본인 전중민신씨 손에 넘어갔다가 종전되자 그가 가지고 가 버린 것이었다.
신라 기와의 문양사 연구에 빼놀 수 없는 이 중요한 기왓장은 일찌기 「신라기와연구」란 책자에 명단만이 실러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늘 궁금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런데 지난봄 문화재보존과학연구관계로 일본에 가는 기회가 있어 해방직전까지 경주박물관을 맡았던 대판금태낭옹을 찾아 도근에 일부러 갔다. 금년 96세의 대판옹은 다행히 전중씨가 복강현북구주시에서 의원 개업중임을 전해줬다.
그래서 노옹에게 여러가지로 간청한 결과 그는 전중씨한테 끊임없는 편지연락으로 간곡히 권유해 전중씨로 하여금 감동케 한 나머지 『가보로 귀중히 간수해 오는 기와지만 학구적인 참고유물을 개인의 욕심으로 가지고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님을 이해』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기증할 결심을 비겼지만 거기에 몇 가지 문젯점이 수반돼 여기에 선전양일 씨의 협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는 법흥왕대였으며 흥륜사는 그 맨 처음 조영된 사찰이다. 이 절은 그 다음 진흥왕 5년(서기544년)에 준공됐는데 건축이나 와공이 모두 백제에서 온 기술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듯 하다. 그 후 불교의 융성에 따라 본사는 찬란한 불교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룬 모태가 된 것이다.
이 절은 고려 중기까지 법등이 계속돼 오다가 원병사 침입으로 소실됨에 폐사되고 말았다.
이 폐사 터에서 가끔 밭갈이하다가 곽목할만한 유물이 출토되는 예가 많았다. 인면문 기와 역시 이 사지에서 농부의 손으로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인면문은 원형의 숫막새에 보통의 연화문 대신 넣은 것이다.
즉 삼국시대의 그것에는 단판연화문을 배치하는 게 통례인데 여기에는 이채롭게 사람의 얼굴을 부각하였다. 그런데 웃음 띤 여성적 표현은 단순하면서도 안면의 균형이 썩 잘 잡히어 현대적 감각의 조각품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충실을 기한 수법이다.
기와의 직경은 15㎝이고, 다만 주연테두리의 하부가 아깝게도 결시되었다. 그렇지만 안면 전체의 표석을 짐작하는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어 천만 다행이다. 【박일훈<경주박물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