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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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월은 모든 것을 마멸시켜 나간다. 그래도 더러 그 모진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는 것들은 있다. 비록 돌 한 쪽이라도-. 이번에 평양을 방문한 남-북 조절위원장 일행은 을밀대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사진으로 보면 대동강기슭 청류벽에 음각된 풍류객들의 시문과 이름들이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을밀대 앞의 돌계단에는 오랜 성상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반질반질 닳아있더라는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 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돌들인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동천 왕이 처음으로 궁성을 세운 것이 바로 이 둘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의 돌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그 위를 밟고 우리네 대표들이 을밀대에 올랐다면…. 범 속의 마음속에라도 그 깊은 감회는 한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시정을 돋우기 위한 억측만은 아닐 듯하다. 만수대의 북쪽 모란봉 아래 있는 부벽루도 이궁이 있던 곳이다.
평양 이궁의 역사는 1천년이나 된다. 고려 예종 때에 이르러 여기에 부벽루를 세울 무렵에는 이미 이궁의 모습은 간데 없이 황폐하고 그저 초석들만이 굴러 있었다. 그리하여 이 돌들 위에 지각을 세웠다는 것이다.
을밀대나, 부벽루나 그 후 여러 차례의 화를 입었다. 청·일 전쟁 때에는 모두 자취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국동란이 있었다.
옛것은 다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돌들만은 어딘가에 남아서 옛 역사와, 그리고 세월의 흐름으로도 흘러나가지 않은 풍류를 얘기해주고 있을 게 틀림없다. 또 적어도 그렇게 보고 싶은 것이다.
예부 터 수많은 선비들이 을밀대와 부벽루에 올라서 시를 읊었다. 절로 시가 나올 만큼 자연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오색운중백옥루비래지상칭천유…』라는 김극기의 시가 나온다.
『등림진일각망환탐간루전수여산…』이렇게 얼이 빠진 듯 해지는 줄도 모르게 강변의 풍치에 젖은 시인도 있었다. 신숙주 김부식 정도전 이숭인… 승람에 기록된 시인들의 이름만 들어도 옛 시문학사는 엮어지리라.
그 어느 한 구절인가는 취흥을 이기다 못한 어느 풍류객이 또 청류벽에 새겨 놓았을 지도 모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말로 강산은 바뀌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앵화여설행화개, 산위대야중중취, 수포장성애애래』라고 노래한 장도빈 처럼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이 쉽사리 바뀌어질 것인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 그렇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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