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종군기] 안성규기자 국경 사막캠프서 3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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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사막으로 오면서 기자는 전쟁영화들을 떠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용맹을 그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월남전의 비장함이 담긴 '지옥의 묵시록'…. 팽팽한 긴장과 함께 '악의 축'을 향한 살기가 등등할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쿠웨이트 사막의 미군들은 아직 전쟁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수개월째 질질 끌고 있는 유엔 내 공방, 인디언의 땅에 뛰어든 미 기병대처럼 열악한 보급 환경,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 때론 시속 1백 ㎞가 넘는 모래바람… 이런 것들이 일단 병사들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기자가 배속된 이라크 국경 인근의 캠프 버지니아. 6,7일 이틀간 불어닥친 강풍으로 식당 천막 8개 중 5개가 주저앉았다. 병사들은 밥을 먹으려면 최소 한 시간은 바람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인가. 훈련도 하루 이틀이지 오랜 시간 '돌격 준비' 명령만을 들어온 병사들은 적잖이 늘어져 있는 기색이다. 일부 병사는 뚜렷한 임무가 없는 듯 막사 야전침대에서 러닝셔츠 차림으로 뒹굴고 있다.

미 해병대 캠프 폭스 출신의 데라와트 하사. 귀신잡는 해병이라지만 아직 사막 어디에도 귀신은 없다. 기자가 물으면 그는 "임전 준비 끝"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나 내심 흐트러진 기색도 내비친다. "다 준비됐다는데 엉성하다"고 찌르면 "그런 점이 있다"며 슬그머니 웃는다.

세계 제1의 부자 군대 미군도 이역만리 사막 땅에 부대를 차리기에는 다소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노트북 컴퓨터는 기자에게는 군인의 소총처럼 소중한 도구다. 밤에 충전해야 하는데 전기가 끊긴다. 부대 발전기로 만드는 전기를 아끼려는 것이다.

기자가 속한 26중대는 전투지원부대다. '지원'이 전공이면서도 기본시설인 통신망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타부대를 지원하는 것이 맡은 임무지만 자체 보급품부터 부족하다.

군수 장병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8일엔 오전 6시부터 보급품 배급 창구인 도하 캠프로 갔지만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하고 오후 9시쯤 복귀했다.

사기(士氣)는 높아 보였지만 환경이 열악하고 몸은 지친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 병사들의 모습일 뿐, 미군은 분주하게 전쟁에 다가서고 있다.

이곳 캠프 버지니아 주변에는 밤이면 깜깜한 하늘을 무대로 조명탄이 터진다.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다. 군용차들은 늦은 밤 헤드라이트를 켜고 꼬리에 먼지 풍선을 달고 사막을 달린다. 헬리콥터들의 엔진음이 사막의 밤잠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다.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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