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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국의 단장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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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카이로」회담(1943년) 당시 장개석 총통은「처칠」·「루스벨트」와 함께 전후의 대일 정책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장 총통은 이 자리에서 천황제는 일본국민의 존경을 나타내는 한 상징인 바, 당연히 그것은 일본국민 자신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고 역설했었다.
-종전당시 중국대륙엔 일본의 군민이 2백만 명 넘게 남아 있었다. 장 총통은 포고령을 내리고 이들을 안전하게 귀국시켰다. 그 무렵 식량사정이 나빴던 사실은 다 아는 바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에게 1인당 20㎏ 내지 30㎏의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전후의 점령문제에 있어서도 미군으로부터 중·일은 서로 매우 근접한 지역인데 점령군(중국군)을 내보내지 않겠느냐는 상담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중국 군이 일본을 점령, 진주하게되면 소련도 필경 이를 따라 점령을 요구하려할 것이다.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한 지 5일간밖에 안되지만, 교전국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되면 일본은 분열, 수습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동서독이나 남북한과 똑같은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1952년 일·화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때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배상의 청구를 포기했다.
-중공의 일본에 대한 태도는 어떤가? 이른바 소·중공우호조약 제2조는 분명히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수년동안 그들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공격해오고 있다. 중공·소는 심각한 대립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조약만은 폐기하지 않고 있다. 일·중공이 관계정상화를 한다면 중공·소 조약은 폐기해야되지 않겠는가?
-전후 일본의 안전을 보장한 것은 무엇인가. 미·일 안보조약이다. 이것은 일본만의 안전·방위가 아니라… 일련의 방위선이며… 지리적으로 일본은 제2선에 있다. 한국과 중화민국 (대만) 의 군사력은 공산세력의 진격을 막아주고 있다.
-일본은 근대사상 3회의 과오를 범했었다. 심양사건·천구교사건·진주만사건. 중공승인은 4회 째의 과오를 범하는 사건이며, 그것은 과거 3회 때의 고통보다 더 심한 어려움을 안겨 줄 것이다.
-대만과 소련과의 접근은 없다. 손문 선생 때부터 우리는 그들의 책략을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환상을 갖지 않는다.
-제2차대전 중 우리는 일본군벌과 고군분투했었다. 굳은 정신력·의지·신념으로…. 물론 금후에도 그런 굳은 의지가 성공을 보증하지는 않지만 마음가짐이 그래서는 안 된다. 이상은 근착 외지에 소개된 장 총통의 장남이며 대만정부의 행정원장인 장경국의 견해이다. 일본과의 단교를 눈앞에 보고있는 그의 침통한 단장곡을 듣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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