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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비평가=우선 김현승씨의 『가상』(월간문학)부터 이야기하기로 하죠. 근래 이분의 시는 너무 틀에 얽매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모든 시가 다 그만하게 옷과 화장을 갖추고 있어서 관전을 보는 기분이랄까.
범 작도 없고 특히 빛나는 시도 눈에 띄지 않는 그런 것 같군요. 『가상』도 예외는 아닙니다. 고뇌가 이분의 시에 늘 들어있는데, 그 고뇌의 내용 차체가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인=동감입니다. 그러나 김현승씨의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젊음」이라는 요소가 있지 않을까요. 이번 시에도 <나의 그림자 서울을 빼앗긴 작은 나라의 지도처럼>같은 표현은 육순을 넘긴 시인의 비유 같지 않고 싱싱합니다. 이분의 시에서는 도무지 나이가 느껴지지 않지요. 그러기 때문에 김광섭씨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시야의 확대를 이룩한 것처럼 이분도 앞으로 변모를 이를 때 무서운 시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비평가=월평에서는 예감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말기로 합시다. 근래에 와서 생활, 특히 농촌생활의 상황을 드러내는 시들은 어떨까요. 농촌 소설 대신 농촌 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인=그것은 지난 몇 년간 언어 조작만을 통한 시라든가 감상적인 도시인의 감정을 노래한 시의 유행에 대한 하나의 「안티·테제」로 중요한 일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전쟁 소설이라든가 농촌 시처럼 「레테르」가 붙은 작품 치고 정말 좋은 문학을 보기 힘듭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만 해도 그것이 역사 소설입니까, 전쟁 소설입니까. 그래서 저는 이즈음에 소위 농촌 시나 농촌 소설에서는 우리 체험의 근거지인 <농촌> 이라는 데만 더 역점을 두고 싶습니다.
비평가=이번 달에는 농촌 체험의 뿌리를 가진 몇 편의 좋은 작품이 특히 눈에 뜁니다. 우선 김준태씨의 『늙은이라도 뿌드득 소리가 나게 껴안는』(문학과 지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볼까요.
할아버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은 흥겹고 고요하여라
난초 잎에 베인 아득한 적막함을
젖은 창호지에 어리는 들 기러기 날개 아래 땅 거미를
횐 두루마기 자락으로 펄럭펄럭 내리 덮어두고
먼 황톳빛 산모통일 돌아 나온 할아버님
젊은 시절엔 다른데서
갑자기 늙어버렸음이라
늙어선 기어다니는 증손자와 함께 소꿉장난을 즐기는 중이다
손도 발도 없는 들꽃이 향기를 뿜어 올리듯
이놈의 가슴에 와서 뚝 그치는 연두 빛 대님의 감촉
조국과 타국이 한꺼번에 보이는 할아버님 앞에서
벌렁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는 이 섭섭함(전반)
다시 어린애로 변모한 할아버지 옆에 누워 아이들 앞에서 어른이 그러듯 담배를 피우는 시인이 아픔을 참는 이 시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 같습니까.
시인=바로 말한 것처럼 「참음」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나는 행복하다」라는 말을 쓰지 않고 「행복」을 표현할 때, 그 시가 힘차지지 않습니까.
비평가=그렇지요. 이 즈음 시에 <사랑>과 <죽음>이라는 낱말이 도처에 보이는데 절실하지 앓더군요. 이점에 있어서 김준태씨의 시에는 <사랑>이라는 낱말 하나 없이 아픈 사랑의 감정이 표출되어 있습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난초 잎에 베인>같은 섬세한 체험도 살아있고 <조국과 타국이 한꺼번에 보이는 할아버님 옆에서> 같이 충격적인 표현도 적절한 탄력을 가진 채 박혀있습니다.
비평가=체험의 절제, 이것은 모든 예술의 비밀이겠지요. 언뜻 보기에는 산만한 것 같으면서도 김준태씨의 시는 절제 속에서 탄력을 갖고 있습니다. 첫 연만해도 <난초 잎><들 기러기 날개><펄럭펄럭> 등 형태가 비슷한 동질적인 「이미지」들을 엄격하게 변주시키고 있습니다.
시인=이번에는 김준태씨처럼 농촌 체험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이추림씨의 『이조 떡살』(현대문학)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대추나무 다발 속에 오동나무 석어
제일로 불길 좋은
큰바람 없는 맑은 가을 중에서도
으뜸가는 며칠을 골라서 가마에 불지피다가
흰빛에 다시 빛을 더한 뼛속의
진 많이 엉긴 옹이의 기름타는 소리
크게 여울져
홧김에 불길 잡아보시다가 (전반 삼연)
비평가=이 시에서도 현재 속에 많은 과거가 보이는군요.
시인=이번에도 절제라는 말을 쓰십시다.
비평가=그런데 이추림씨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제일로 불길 좋은><으뜸가는 며칠을 골라서><누님의 감춰 두었던> 등등의 서정주 적 표현은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시인=그 점은 저도 생각해 보았는데 시 전체로 볼 때 서정주씨와는 바로 반대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서정주씨의 <제일>이나 <으뜸>은 「명등」을 위해 사용된데 비해 이추림씨에게 있어서는 「한의 축적」을 위해 동원되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너무 길어 인용을 생략했지만 <누님의 감춰 두었던>은 <어깨 힘이 내려 쩍는>같이 둔탁한 표현을 수식하는 말이지요.
비평가=다음으로 정지하 씨의 『대구 피서 초』(시문학)는 어떻습니까.
시인=<송충이 나방이는 물 샐 틈 없이 사과나무에 매단 꿈의 등불을 에워싸고>있는 과수원에서 여름을 보내는 시인의 마음이 그 만큼 여유를 보이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것도 사실한 인생관의 타오름이겠지요. 사투리도 효과를 주고있고. <누구든 푸르게 충혈된 눈알을 빛내며 금호강가 능금밭의 나를 찾아왔으면 하모, 내 그를 맞아 한껏 소주를 들었으리.> 한번 대구행을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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