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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구구한 도동연대|김창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선현 왕인은 백제가 낳은 대학자로서 지덕을 겸비한 대신인이다. 비문에 의하면 일본 응곤 천황의 초빙을 받아 백제 구수왕의 문학사절로 건너갔고, 거기서 일본황실의 사부가 되었음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윤리도덕을 널리 가르쳐 일본문화사상신기원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이역에서 일생을 마친 것이다.
따라서 일본 조정에서는 그의 공덕에 보답코자 「후미노오비도」등의 시조로 존칭을 받들고 대화십시현을 할양하였다. 이곳을 지금 백제군, 혹은 백제향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왕인의 도동연대에 대해서는 일본측의 고사서 사이에도 기록이 일치하지 않다. 「고사기」에 의하면 왕인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응곤 16년을사, 즉 서기285년으로 돼있다. 백제의 조고왕에게 현인을 보내달라고 하니 「와니·기시」란 사람이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왔고, 이밖에 야공·직조공·양사자 등도 함께 보내왔다고 하였다. 여기서 「와니」는 왕인을 뜻하고 「기지」는 귀인·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조고왕에 대해선 문제가 있다. 백제의 조고왕은 초고왕(l66∼213년)으론 보기 어렵고 오히려 근초고왕(346∼374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왕인이 도동하던 해에 백제에서는 아화왕(아화왕=392∼404년)이 돌아갔기 때문에 일본에 와있던 아직기가 귀국해 즉위(여지왕)하였다고 하였다. 「고사기」의 응곤 조기록과는 약 1백20년의 차이가 있다.
또 「속일본기」에 의하면 응신조에 백제왕 귀수왕(근구수왕=375∼383년)이 왕족 중에서 사람을 선택해 보냈는데 특히 그 손자 장손왕을 왜왕이 총애하여 대자의 스승을 삼았으며, 처음으로 서적을 전하여 크게 유풍이 훌륭하였다고 하였다. 백제의 왕조는 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옥-장사왕-아신왕-여지왕의 순서이므로, 이 기록의 연대는 전자의 중간에 속한다.
이러한 여러 기록상의 연대 차에 대하여 이병렴 박사는 왕인이 일본에 건너간 것이 3세기가 아니라 백제 근구수왕대∼아신왕대에 걸치는 4기 후반에 속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4세기말에 백제는 동진과 국교를 닿은 이래 남배조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한 일본과의 우호친서도 이 무렵에 두터웠다는 사실을 지적해 그와 같이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일본의 옛 기록에 의하면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자 「간파진인짐옥차화동농」이라는 장가를 지어 축하하였다. 천황은 크게 감동하여 왕인으로서 두 황자인 원도치낭자와 대아아황(척대 인덕천황)의 스승을 삼고 모든 전적을 습득케 하였다.
이것이 일본에 유풍 전래의 개조이며, 이로부터 유학이 흥성케 되었으며 따라서 일본에 학교교육의 창시가 되었다. 그는 또한 데리고 간 기술자를 활용하여 토지·전답을 개발하며 점차 생산력중대에 박차를 가하고 마 사육을 장려하여 교통과 운수 등에도 개혁을 가져와서 고대산업을 크게 발전시킴으로써 국민의 경제생활 면에도 새 출발을 하게된 것이다.
왕인이 일본에 정착한 곳은 하내국의 고시군이라고 하였다. 당시 하내 지방은 고대의 유력한 정치상 거점으로서 중요한 많은 기관이 있었다. 따라서 뇌호내항로는 대외관계에 중요한 「코스」로서 대판만에서 대화국에의 통로로서도 정치·문화 및 경제적 위치가 극히 높이 평가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고대 국가형성의 요람지로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왕인의 활동 본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고 한다.
그는 황실의 스승일뿐더러 구의 후예인 문씨가 궁정의 가장 중대문제인 황위계승을 확인하는 장소에서 「시기」의 필록에 참가하였다. 당시 필록자는 외내인들, 흑은 그의 후예들이었으며 그들에 대한 조정의 신뢰감이 높아 필연적으로 정부기능의 일부를 분장하였다고 「고사기」에 기록돼 있다.
그가 죽은 뒤 후예 중에는 다음에 이야기할 중앙정계에 실력자, 지방에 있어서의 호족, 불교계에 대승정, 문학자 및 토건계에도 탁월한 기사들을 수없이 배출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서 그의 정치활동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또한 없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앞으로 더욱 발굴되어 신중히 다루어야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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