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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176)|한갑수<제자·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정부가 수립되던 48년 8월께 였다.
하루는 후암동 나의 집으로 국회사무처 차장으로 있던 노 모씨가 찾아와 우리 나라 해법의 원본을 한글로 정서 해줄 것과 우리나라독립에 공이 많은 영국의「조지」6세(현「엘리자베드」 여왕의 부친)와「트루먼」미 대통령, 장개석 자유중국총통에게 수여할 무궁화훈장의 상장을 써 달라고 왔다.
나는 그가 부르는 대로『대한민국은 우방 미국의 원수「트루먼」미 대통령이 우리 나라 독립에 끼친바 공이 많으므로 이에 무궁화훈장을 드리어 길이 기념함.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썼다.
그후 며칠이 지나서 노씨가 나의 집으로 허겁지겁 뛰어왔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죄송하지만 다시 상장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 글씨에 무슨 잘못이 있나하여 무엇 때문에 다시 쓰느냐고 물으니 노 차장은 이 박사가 맞춤법이 물리니 다시 쓰라고 한다고 전했다. 이 박사가 지적한 문제의 대목은 공이「많으므로」와 이승만의「이」자였다.
노 차장은 나에게「많으므로」를「만흐므로」로「이」자를「리」자로 각각 고치라고 했다면서 틀린 줄은 알지만 좀 고쳐줘야겠다고 간청했다.
나는 이를 즉석에서 거절했다. 아무리 이 박사의 명령이지만 이 요구만은 들어 줄 수 없어『내가 광주로 가고 없더라고 전해달라』고 노 차장에게 부탁하고 집을 나서고 말았다.
과연 그 이튿날 광주에서 신문을 보니 이 박사의 노한 성명이 나와 있었다. 이 박사는 『일부 고고한 학자들이 아직도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서『국민이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국문을 쓰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이 한글파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다. 이 박사의 이 특별성명이 나오자 한글학계는 발칵 뒤집혀 22차의 회의를 거친 끝에 결국 현행 맞춤법이 가장 쓰기에 쉬운 것이라고 결론, 일단락을 짓게 됐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끼친 물의는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 박사가 집권 12년 동안 아마 이 박사 뜻대로 안된 것은 이 문제 하나 뿐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한 이 박사는 처음에 우리말이 서툴렀을 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제일 먼저 번역된「로스」성경에 익숙해있었기 때문에 그의 맞춤법 지론은 이「로스」성경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되도록 덧 받침을 쓰지 않고 아래「ㅎ」도 쓰도록 하자는 주장이었고 끝내 이승만이라는 이름자 중「이」자 만은「리」자로 고집했다.
그러나 이 박사가 한글을 아낀 것만은 사실이다.
경무대 시절에서 외부에 보낸 편지는 한글이면 한글, 한문이면 한문이지 한글과 한문이 섞인 편지는 절대 발송치 못하게 했다.
따라서 대게 경무대에서 발송하는 편지는 한글이 많았고 영문편지가 있었을 뿐 한문편지는 극히 드물었다.
59년인가 이 박사가 서울법대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의 일이다.
수여식 30분전에야 도착한 이 박사는「가운」을 입으러 총장실에 안내되었다.
이 박사는 대뜸 서울대총장에게 물었다.
이 박사=오늘 나에게 뭘 줄 테야.
총장=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드립니다.
이 박사=그거 고맙군. 어디 좀 볼 수 없나.
총장=예, 여기 있습니다.
이 박사=(한참 들여다보더니) 난 이런 건 받기 싫어, 가져 가. 정 주려거든 순 한문으로 쓰거나 한글로 써 줘. 섞어 쓰는 것은 질색이야.
이 바람에 당황한 학교측은 급히 한은 조사부에 근무하던 최영순 씨를 불러와 현장에서 순 한글로 고쳐 쓰느라고 수여식이 30분 이상이나 지체되기도 했다.
식이 끝난 후 곧 이어 의과대학 교정에서 13개 모범미군부대에 대한 부대표창 식이 있었다.
대개 이 박사는 표창장을 수여하기만 하고 상장 본문은 내가 곁에서 읽는 게 상례인데 이날 따라 이 박사는 자신이 손수 영문으로 된 본문을 읽었다.
이 박사의 영어는 능하기는 하지만 읽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때마침 늦더위가 극성을 피우던 8월 하순이었고 수여식이 30분이나 지연된 데다가 군인들은 1시간 전부터 대오를 지어서 있었기 때문에 픽픽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전혀 이에 개의치 않고 13개 부대에 대한 표창장을 느릿느릿 읽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곁에 있던 장기봉씨(현 신아일보 사장)가 너무 민망하여『손수 읽으실 것 없이 한 대령(나의 별명)에게 시키시지요』라고 권유하자 이 박사는 나에게「바통」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박사는『그거 뭐 젊은 놈들이 이까짓 햇볕에 퍽퍽 쓰러지니 전쟁은 무슨 전쟁을 하겠느냐』면서 오히려 미군들의 인내심을 책망했다.
이날 이 박사가 손수 영문을 낭독한 것은 내가 55년 이 박사의 영문 관계 일을 맡은이래 처음 있는 일로서 왜 굳이 자신이 읽으려했는지 지금도 그 속셈을 헤아릴 수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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