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평양냉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6·25 이후 서울에는 냉면집이 많이 생겼는데 그 간판에는 반드시 「평양냉면」이라고 쓰여져 있다. 때때로 냉면 생각이 나서 동료들과 음식점에 들어가 냉면을 청해놓고 보면 옛날 평양에서 먹던 그 냉면이 아니다. 어디 냉면 맛이 그랬던가. 우선 보기에 다른 걸.
옛날 내가 먹던 냉면은 순 메밀국수로 빛깔이 약간 검고 국수발이 굵으면서 번드레한 맛이 없었다. 육수가 맑고, 위에 무우김치를 길고 얇게 썰어 넣고 쇠고기·돼지고기 편육을 먹음직스레 덮고, 그 위에 꿩탕과 닭고기를 소담하게 얹은 다음 삶은 계란·지단·고추·다대기를 듬뿍 쳐서 얼음을 띄워 내온다. 냉면그릇만 보아도 식욕을 돋우는 군침을 다시고 나서 젓가락을 들게 된다. 우선 냉면엔 김치·깍두기·동치미가 맛있어야 한다.
이제는 아득한 옛일만 같아 기억조차 아리송하다. 우리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관녁골(문관리) 골목 끝에 「관동면옥」이 있었는데 어른들을 따라 이따금 냉면 먹으러 가던 생각이 난다. 주인은 단골이라고 『안으로 모셔라』소리를 버럭 지른다. 그때는 냉면에 따라 나오는 것이 많기도 했다. 큼직큼직하게 썰어 벌겋게 익은 배추김치, 한쪽을 넣어도 입안이 가득 차는 먹음직스러운 깍두기, 숟갈로 먹기 좋게 쪼개놓은 동치미, 무우는 아작아작 배맛 같았고 국물은 마치 「사이다」맛 같았다. 지금도 어렸을 적에 어른들 따라 냉면집에 가면 맵지 않고 달큰하면서 시원한 동치미만 연신 들어먹던 생각이 난다.
삿전골(죽전리)에는 「강호면옥」이 있었는데 여기는 쟁반이 유명했다. 쟁반은 쇠고기 중에서 가장 맛있고 연한 고기를 편육으로 썰어 맛나게 무친 것인데 큰 놋상(유상)에 펴놓고 위에 갖은 양념을 얹어 그 가운데 양념초장을 곁들여(4인이 1조) 나온다.
쟁반을 먹으러 「강호면옥」에 가려면 2인, 3인, 4인 짝을 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가는 것이 보통이다. 기억 속에 즐거웠던 것은 어른들과 같이 쟁반의 고기를 다 먹고 나서 그 국물에 사리국수를 청해서 먹는데 국물을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사람 이외에는 모두 젓가락을 든 채 기다려야 하고 그도 공평하게 돌아가며 마시노라면 나도 한몫 끼는데 웃음을 참으면서 마시던 생각이 난다. 서로 「키스」하는 것 같은 기분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다정한 사이가 아니면 같이 먹을 수 없다.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 『쟁반이나 먹지』하는 이야기는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한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주고받는 그 다정한 맛이 한결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평양사람 치고 냉면을 즐기지 않는 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냉면은 여름에 먹는 음식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실은 겨울에 뜨끈뜨끈한 온돌방 아랫목에 앉아 혀끝이 짜르르한 동치미에 꿩탕을 넣어 벌겋게 다진 고추나 듬뿍 놓아 겨자·초로 간을 맞추어 먹는 맛이란 일미이다. 뒤에 끓는 국숫물을 마시는 맛 또한 구수하다.
이야다리에 「안면옥」이라고 있었는데 그 집 냉면도 괜찮았다. 같은 냉면집이면서도 무엇인가 특색이 있어야만 한다. 뉘집엔 동치미가 맛있는 걸 소문나면 모두 그리 몰려가게 마련이다. 그 당시는 중머리가 국수 누르기도 하고 냉면그릇 나르기도 하였다. 냉면을 주문하면 「카운터」에 앉은 이가 『안방에 냉면 몇 그릇』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 중머리는『네에이』하고 목소리를 빼던 모양.
하루 속히 남북적십자회담이 성취되어 그리웠던 인척들과 만나 평양냉면을 먹어보았으면 한다. [석주선<동덕여대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