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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전시하의 정치파동⑬책략과 실각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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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내각 귀임 제 개헌안이 이 박사 반대세력이 압도적인 국회에서 통과될 전망이 뚜렷하던 52년4월 중순 국회 측 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장택상 국회부의장은 정치적 큰 도박을 벌였다.
장 부의장은 개헌은 원칙으로 찬성하되 개헌안의 내용을 재검토하고 상정시기를 재고하며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인선에 사전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개헌4개 원칙을 내걸고 동조자의 찬성 날인을 받기 시작해 20여명의 날인을 받았다.
개헌안에 서명한 의원이 통과에 필요한 재적3분의2선인 1백23명으로 한사람이라도 이탈하면 개헌 선이 무너질 입장에 있을 때에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개헌4개 원칙이 나오자 개헌추진 파의 충격은 적지 앉았다.
더구나 이 원칙에 찬성한 20명의 의원 중에는 개헌안에 서명한 의원이 상당수가 끼여있어 개헌안이 통과될 전망마저 흐리게 됐고 이제 통과의 열쇠는 장택상 부의장이 쥐게 되었다.
20여명의 의원을 포섭하여 신라 회란 교섭단체를 만든 장국회부의장은 개헌추진 파에 개헌이 성취 됐을 때 어느 위치의 보장을 요구했다가 뜻대로 안 되자 끝내는 그들과 결별했다. 이때 흥정의 내막을 한 관계자는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장 총리 국회인준 가95·부 81표>
▲곽상훈씨(1, 2, 3, 4대 민의원·전 민의원의장·현 육영재단이사장·77)<원내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대한 서명을 받을 때 나는 국회의 중진인 장택상 부의장에게 여러 번 교섭을 벌였어요.
내가 그에게 『나라가 큰일이니 개헌안에 서명하고 같이 일하자』고 했더니 장 부의장은 서명한다면 개헌이 된 후 자기가 맡을 역할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읍디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크게 실망했어요. 내가 『개헌이 되면 창랑같은 인사의 지위는 불문가지가 아니냐. 그걸 흥정하다니 말이 되느냐. 도장만 찍어라. 그 뒤는 내가 책임지마』고 했더니 그는 어떤 언질이 있어야 되겠다는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 보장은 할 수 있어도 지금 당장 약속은 할 수 없다고 했더니 그는 끝내 도장을 안 찍더군요. > 이 무렵에 이 박사의 정적으로 지목 받은 장면총리는 조만간 사임하고 내각 귀임 제 개헌 성취의 열쇠를 쥐고있는 장택상 부의장이 총리로 지명될 것이라는 관측이 자자했다.
아니나 다를까 4월19일 장면총리가 사표를 제출하자 이대통령은 이광영씨를 무임소장관으로 다시 기용, 총리서리로 임명함과 동시에 예측대로 장택상 부의장을 총리로 지명해 국회에 인준을 요청했다.
52년5월6일 국무총리 인준투표를 위해 소집된 임시국회는 가95, 부81표로 장택상씨의 총리 인준 안을 가결했다.
내각 귀임 제 개헌 파의 분열을 가져오게 한 장택상씨의 인준획득은 당초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됐으나 신라 회 소학의원과 원외자유당의원의 지지와 함께 국회부의장의 입각이 당시의 불안한 상황아래서는 의원들의 신분보장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다수 개헌추진 파에서도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장택상 총리는 5월14일 정부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제출되어 두개의 개헌안을 두고 여야가 양극을 치닫자 사태수습을 위해서는 두개의 개헌안에서 필요한 조항만 발췌한 이른바 발췌안을 내놓고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파 의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신라 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발췌개헌안의 골자는 ①대통령·부통령직선제 ②국회 양원제 ③국무위 부임 명에 총리와 같이 하원인 민의원의 승인을 얻는다 ④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민의원에 대해 국무원에 속한 사항에 대해 전체책임을 지고 각자행위에 대해 개별 책임을 진다는 것 등이었다,
명칭은 비록 양 개헌안 조항을 발췌한 것이라고 했으나 정부안인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주 골자로 하고 있었다.
장 총리는 5월24일 내무부장관에 취임한 이범석 장군과 함께 야당의원을 탄압과 회유의 두가지수법을 구사하여 마침내는 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주역을 담당했다.
물론 장 총리자신도 그 나름대로의 정치적 신념에서 이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이 무렵의 장택상 총리 측근인사의 얘기.

<관제민의 보고 눈물 흘리기도>
▲김영삼씨(당시 장택상 총리비서·3, 5, 6, 7 대의원·현 국회의원·45) <장택상씨는 국회 부의장으로 있을 때 「유엔」총회에 갔다 약3주만에 돌아와 2, 3차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난국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이 박사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무척 고민합디다.
그는 내각 귀임 제 개헌을 주장하는 야당 측 입장과 대통령 직선제를 고집하는 이 박사 세력이 극한적으로 대립하면 이 박사가 우위에 서는 입장에서 파국이 온다고 말하더군요.
적어도 양 대 세력의 극한적인 충돌을 피하고 정국을 수습하는 길은 두개의 개헌안을 절충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장택상씨는 울릉 출신의 서이환 의원, 서울출신의 오성환 의원 등과 자주 접촉하고 정국수습을 상의하는 것 같더군요. 발췌개헌안은 어떤 정치적인 야심에서 생각해낸 것이 아니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오로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어요.
장 총리는 누가 무어라 해도 그 당시 발췌개헌안이 아니었더라면 정국의 파국은 막을 수 없었다고 술회하는 걸 여러 번 들었습니다.
장택상씨는 국무총리가 된 후에도 이 박사와 뜻이 안 맞는 일이 많아 밤늦게까지 고민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구요.
관제민의 등원으로 땃벌떼·백골단 등의 폭력배가 날뛰는 걸보고는 내가 국무총리를 하면 무얼 하겠느냐고 자주 탄식합디다.
하루는 총리실에서 길거리의 소란한 모양을 보더니 이게 민주주의냐 면서 눈물을 흘립디다.>
장택상 총리는 어려운 정국을 발췌개헌안 통과로 수습하는데 이범석 내무장관과 공동보조를 취했지만 둘 사이는 처음부터 오월동주 인양 미묘했다.
정부수립 후 조각에서 이범석 장군이 총리, 장택상씨가 외무장관이던 입장이 지금 와서는 장택상씨가 총리, 이범석 장군이 내무장관이라는 반대경우가 돼 두 사람 사이에는 좋다고 할 수 없는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같은 감정은 정국의 수습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이범석 내무장관이 야당인사들을 심하게 누르려고 했을 때 장택상 총리는 이 내무에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야당 의원들과 접촉을 갖고 협상을 벌이기도 했고 야당 의원을 안내란 이름으로 국회에 강제로 등원케 하는데도 총리는 내무장관과 상의 없이 경찰간부에 지시해서 경찰을 동원해 후자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주=본 연재352회 참조).

<이 박사, 대통령에 불출마 표명>
그러나 이 같은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도 정치파동 기 동안에는 같은 목표달성 때문에 크게 표면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국이 수습된 다음부터 서서히 고개들 들기 시작하더니 2대 정·부통령 선거과정에서 정면으로 대립 폭발하고 말았다.
이 박사 재선의 기반을 굳혀준 발췌개헌안 통과에 장 총리 이상으로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족청계 세력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의 원내지지세력인 원외자유당도 양우정 의원 등 족청 세력이 압도 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원외에서 적극 협조한 이범석 내무장관이 족청의 대표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원용덕 계엄사령관도 족청 계와 긴밀한 유대를 갖고 있었다.
족청 일색인 원외 자유당은 그해 8월5일 실시될 대통령·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당의 후보를 지명할 전당대회를 7월19일 대전에서 열고 이 박사와 이범석 장군을 정·부통령후보로 만장일치로 지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15일 정·부통령선거법안이 통과될 때부터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국민의 의사와 요청이 있을 것 같으면 재고해보겠다고 말했다.
원외 자유당 전당대회에도 이 같은 그의 태도를 거듭 강조하고 자기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천1백여 명의 대의원들이 만장일치로 이 박사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자 마감 일을 4일 앞둔 7월22일 이 박사는 민의를 굽힐 수 없어 지명을 수락한다고 출마의사를 밝히고 그날로 대통령후보 등록을 했다.

<선거 9일전에 지명거부 성명>
이범석 내무장관은 전기대회에서 그를 부통령후보로 지명하자 즉각 이 박사를 받들어 부통령후보로 나설 뜻을 밝히고 7월22일 내무부장관직을 내놓고 부통령후보로 등록을 마쳤다.
후임 내무장관에는 서울시장인 김태선씨가 기용됐다.
그런데 선거를 불과 9일 앞둔 7월26일 이 박사는 진해에서 이범석 장군이 자유재의 절명으로 부통령에 나섰으나 자기로서는 부통령을 지명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해 이 후보를 비롯한 족청 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박사의 이 성명은 바로 이범석 후보 아닌 다른 후보를 「러닝·메이트」로 원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박사가 선거를 며칠 앞두고 이같이 이범석 장군을 기피하게 된 것은 당시 장택상 총리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밝혀져 이 사건으로 격화된 두 사람의 대립은 뒷날 급기야 양인이 공히 실각하는 사태로까지 몰고 갔다.
◆주요일지(1952년3월16,17,18,19일)
※16일 ▲공중전서 「미그」기 13대 격추 파 ▲휴전회담, 「유엔」군 측 감시 안에 공산측 동의 ▲사회부, 피란민 총수7백45만1천6백29명이라 발표
※17일 ▲미군 기, 1천회 출격 ▲공산 측, 미 기가 포로 수용소 폭격했다고 비난
※18일 ▲부역 법 완전 철폐 ▲「애치슨」국무, 한국휴전성립을 낙관
※19일 ▲「밴플리트」8군 사령관, 공산군의 새 춘계 공세 없으리라고 언명 ▲서울 일원에 강진.
※알림=『전시하의 정치활동』은 앞으로 366회로 끝내고 8월25일(금)부터는 한국전쟁 시말과 여러모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스탈린」의 죽음』을 다룰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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