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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제자 윤석오)제26화 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6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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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군정 교섭>
해방후의 우파 정당 중 정권 투쟁을 짜임새 있게 추진한 것은 한민당이랄 수 있다. 그들은 재력과 신문을 갖고 있는 데다 유지들로 구성돼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멤버」들의 교육 수준이 높았다는 점에서 미래가 약속되는 정권 담당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들 「멤버」 중 예외도 있지만 다수가 총독 치하에서 안주했다는 것이 약점이기도 했다.
해방이라는 관념에는 가난하게 핍박받은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 혁명적인 의미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에서 이 박사를 옹립하고 나선 것은 그들에게는 최고 지도자로 모실 만한 광복 운동의 거물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민당으로서는 환국한 이 박사에게 기대를 집중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한 정당의 옹립보다도 국민적 일치의 힘으로 미·소·영 등의 국제 협약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정당 대표들이 모여 구성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더 많은 기대를 걸었다. 이 모임은 한민당엔 불만스런 일이었다.
또 하나 그들이 이 박사의 태도에서 놀란 것은 그의 철저한 임정 법통론이었다.
이 점은 한민당의 당초의 예상에는 어긋났다. 한민당은 이 박사와 같이 임정을 지지하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임정은 12월 1일 군산항으로 환국했다. 그에 앞서 송진우는 한민당을 대표하여 다른 정당 단체에 기선을 제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임정만이 유일 진정한 정부라는 것과 임정 요인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은 다만 대외관계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민당은 임정의 환국을 환영하는 임정 봉영 대회에 주동 역을 맡고 나섰다.
김구 주석 일행을 우리는 경교장으로 모셨다. 최창학씨의 집을 내가 교섭, 마련했다. 조소앙 신익희 등 일행에겐 낙산장을 마련해 줬었다. 그들은 도착 다음날 경교장에서 환국 첫 번째의 각의를 열었다. 김구 주석으로부터 이 박사를 모시고 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각료라야 서로 고생한 이야기며 공적론에 관한 것이었다. 이 박사는 잠시 참석했다가 곧 자리를 떴다. 내가 그를 대신해서 끝까지 앉아 있었다. 이 박사와 김구 주석은 임정의 대군정 대책에 관한 사전 협의가 있었었다. 임정의 모든 간부들은 군정과의 「델리키트」한 관계로 인한 두 분의 고충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복잡한 압력을 뒤늦게 깨달아 외무부장으로 있던 조소앙도 할 수 없이 국정은 논의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그들은 임정의 각원으로서 「하지」·「아널드」를 방문했다. 그들의 소신과는 달리 미군 당국은 의외로 완고했다. 결국 그들은 개인 자격으로 군정에 협력한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와야 했다. 임정의 간부들로서는 뜻밖의 충격이었다. 그들의 실망은 이날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민당도 초조해졌다. 1차 각의의 내용에서 한줄의 암영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대표를 휘문 중학교에 소집하여 대한 국민 총회라는 대대적인 집회를 가졌다. 김성수가 대회 의장이 된 이 집회에서 그들은 독립 촉성을 결의하고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란 걸 발표했다.
물론 이 헌장은 임정을 정통 정부로 인정하고서이다. 공식 대회와 헌장을 통해서 임정을 끌고 가자는 한민당의 정치적 「이니셔티브」였다.
그러나 임정 요원 중의 많은 수는 한민당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내 정세에 어두웠고 한민당에 대해선 친일적이던 국내 지식 계급이 많다는 눈으로 봤다. 점차적으로 임정은 한국당에 옹립되기 보다는 미군 당국과의 타협이 중요한 초점이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수일 후에 그들은 다시 경교장에서 극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대하여 조소앙은 『임정은 건국의 공구』라는 알듯 모를 듯한 표현을 하였으나 그 내용은 임정의 앞날이 이승만 박사의 군정과의 절충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세는 다시 변하여 이 박사 중심으로 구국 위원회란 것이 조직되었다. 이 박사가 정치와 경제를 다루면 미군 당국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 박사는 며칠 동안 말없이 돈암장에 들어앉아만 있었다. 김구 주석만이 자주 와서 의논했을 뿐 한민당이나 다른 정당 단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인민당과 공산당들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내걸고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충하는 판이었다. 이 박사는 「하지」가 민주주의 명목으로 그러한 좌익계 활동을 묵인하는 것은 간접적 후원과 마찬가지라고 보고 강력히 항의했다. 인민 공화국이란 걸 해체하지 않으면 거족적으로 투쟁하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결국 「하지」는 이 박사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12월 12일의 그의 인민공화국 해체령을 나는 잊지 못한다.
박헌영 여운형 등의 공산계는 뜻밖의 일에 당황하였으나 반항할 수가 없었다. 우익계에서는 「하지」의 방송 성명을지지 환영했다. 특히 1백만 기독교인의 지지는 미군 당국의 태도를 확고히 하는데 큰 힘이었다.
「하지」의 해체령 방송을 계기로 이 박사와 「하지」·「아널드」 3인의 회담은 다시 빈번해졌다. 이 박사의 임정법 통론이 곧 한국민의 일치된 여론임을 뒤늦게나마 반성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 정가에서는 누구나 이 박사의 대군정 교섭이 성공하리라고 믿었다. 「하지」·「아널드」와의 몇 차례의 회담을 통해서 그는 임정의 행정권 접수 방법까지 의논을 진전시켰었다. 일시에 전면 접수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점진적으로 하느냐는 의견마저 오고갔었다. 결국 그것은 미국의 정책 문제이며 국무성의 지시에 따라서 할 일이기 때문에 이 박사가 도미해서 미국무성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하지」와 「아널드」는 암시했었다.
이러한 추세를 놓치지 않고 이 박사는 거족적인 임정 환영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가서 목적을 쟁취할 수 있는 뒷받침이 현실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임정 환국 봉영 대회 등의 모임을 방방 곳곳에서 끝난 후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임정 환영 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열었다. 「하지」도 임정의 환국을 환영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대회의 이틀 전에 「모스크바」에서는 미·영·소의 3상 회담이 열렸고 여기서 난데없이 5개년 신탁통치안이 나올 줄은 이 박사도 생각조차 못했다. <계속> 【윤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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