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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35)|곽상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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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박사와 야당>(10)
이 박사는 장면박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장 박사가 그와 대립할 아무 일도 없는데도 말없이 그를 떠나 최초의 도전자가 되었다는데서 배신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박사가 장 박사를 알게 된 것은 해방후일 것으로 기억된다. 초기 두 분이 어떻게 연결 됐던 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이 박사가 대통령에 당선돼 조각에 착수했을 때 국내「카톨릭」계에서『「카톨릭」교인 한 사람은 입각시켜 주어야 한다』고 이 박사에게 강 청, 장 박사를 문교장관에 기용해 주도록 건의했던 모양이다.
이 박사는 이 제의에 대해 처음엔 퍽 호의적이었는데 조각에서 장 박사 이름이 빠져버렸다.
이 박사는 조각명단을 발표하면서 장 박사에게 비서를 보내『형편상 장관으로는 기용 못했지만 대신「유엔」총회대표로 임명할 생각이니 맡아달라』는 기별을 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해서 장 박사는 첫「유엔」총회 일이 끝나자 주미대사를 발령 받았다.
장 박사는 6·25를 당해 주미대사로서 미군의 즉각적인 동원,「유엔」총회의 참전결의 등을 실현한 외교능력이 평가돼 51년 초 국무총리로 기용되어 귀국했다.
장 총리 하에서도 행정부와 국회의 대립이 잦아 급기야 국회 안의 야당세력은 한민 당 아닌 사람 중에서 이 박사를 교체할 새로운 집권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장 박사였다. 당시 주동인물은 오위영 김영선 한동석씨 등이었다.
이들이 장 박사를 내세운 것은 장 박사가 독자적 정치세력이 없고 고집이 없고 온건하며 대미 관계가 좋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이리하여 장 박사의 양해아래 52년 11월로 예정된 국회의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는 은밀한 득표공작이 계속됐고 한민 당의 동의도 얻어 그 세력이 필요한 3분의2선에 접근해가자 장 박사는 그해 여름 총리직을 물러났다.
장 박사는 사표를 내면서 이런 내색은 전혀 않고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워 물러난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경위로 이 박사는 장 박사에게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갖게된 것 같다.
이 박사는 장 박사가 총리직을 떠나자 국회의 이 같은 공작을 알고 그해 8·15경축사를 통해 자유당창당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제시, 본격적인 대 국회 공작에 착수했다.
이 박사는 장 박사와 상종하기를 꺼리는 듯 했다.
장 박사가 3대 부통령으로 재직 중에는 야당출신이라는 사정까지 겹쳐 아주 소외되었다.
언젠가 국회개회식 때의 일이다. 장 부통령이 한발 앞서 의사당에 입장해 있었다. 이 대통령이 입장하여 그 앞을 지나갈 때 장 부통령이 일어서서 인사를 했으나 이 박사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이른바 장 부통령 피격사건은 부통령선거의 「라이벌」이었던 이기붕씨 주변에서 꾸며졌던 것으로 안다.
이때 이 박사는 저격사건의 보고를 듣고『명색이 부통령인데 어떤 자가 그런 못된 짓을 꾸몄어? 당장 규명해야해』라고 화를 내더라는 말을 뒤에 들었다.
죽 산 조봉암에 대해선 이 박사는 그리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죽 산이 해방직후 좌익세력과 결별하고 국회에 진출해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그 사람 똑똑한 사람이야』라고 평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조각에서 일반의 예상을 완전히 깨고 죽 산을 농림장관에 기용했다. 아마 정파를 초월한 거국내각보다 서민적 인상도 풍기는 내각을 위해서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는 농지개혁 등 건국 초의 어려운 일을 잘 해 냈고 50년 초 야당이 제안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봉쇄하는데도 공이 컸다.
그래서 이 박사는 그를 유능하다고 평했다.
죽 산도 이 박사에 대해선 경의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이 박사에게 충심으로 협력했다. 오히려 한민 당을 좋지 못한 세력이라고 매우 싫어했다. 그러던 죽 산이 52년 7월 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이 박사에 도전했다. 55년 말 야당세력을 규합해서 태동한 신당(민주당) 창당운동에서 민국당 계의 반대로 소외당한 죽 산은 진보당이란 혁신정당을 창당해서 이 박사와 보수정당에 대결할 채비를 해 갔었다.
이 박사는 혁신정당을 이단시했다.
이 박사는 혁신정당이란 공산당과 비슷한 주의 주장을 내세우는 용공집단이므로 남-북이 대선 해 있는 우리 나라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다 죽 산 개인에 대해서도 이 박사가 장 박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비슷이 개인적으로도『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박사는 55년 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측근들과 얘기하던 중『조봉암 이가 집권을 바란다지? 내년 선거에서 내가 또 그 불순한자의 도전을 받게되는 구 먼』하는 말을 하더라는 얘기를 그때 들었다.
그렇다고 이 박사가 미워한 나머지 죽 산을 공산당으로 몰아 사형했다고는 나는 생각지 않는다. 아마 수사당국이 간접사건 수사 중 진보당에 돈대준 것을 알아냈다고 하니까 이 박사는 그런 일이 있었음 직 하다고 아주 쉽게 수긍을 하게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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