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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제자는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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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박사와 야당>(8)
이 박사와 유석간의 문교장관 얘기가 간접으로 있은 한달 뒤 이 박사는 경무대로 유석을 불렀다. 이 박사는 이 자리서도 『내가 부원간 문교장관을 바꿀 생각인데 조 박사가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석은 『나는 주색풍류객으로 세상에 선전이 돼있어서 청년학생들의 사표로서의 문교장관은 적당치 않다.』고 사양했다.
이 박사는 이 말을 듣고 싱긋 웃으면서 『그런 무슨 장관을 지망하느냐』고 물었고 유석이 『내무나 국방이면 맡겠다.』고 하자 『내무·국방 두 장관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당분간은 곤란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래서 유석의 입관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대신 다시 특사로 나가게 됐다.
유석은 이날 바로 그 자리서 『원래 유엔총회 때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결의안 중에는 48년말을 기해 북한 주둔 소련군이 철수하면 미군도 남한에서 즉시 철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당시의 왕세걸 중국외교관장이 미리 연통해 주어 우리대표단이 미국에 항의, 「즉시 철수」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철수」라고 수정하게 되었다.』는 비화를 밝히고 『미국철수에 대비한 대미군수교섭 사절을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이 박사는 이 말을 들고 『아주 긴요한 문제를 잘 지적했다』면서 그 자리에서 대미군사 원조교섭을 위한 대통령 특사에다 주 유엔 전권대사도 겸하게 해 그 자리서 발령했다. 이 박사는 또 이범석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특사가 된 유석을 도와 군사원조요청에 관한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유석을 이렇게 해서 49년3월 다시 도미해 그해 가을의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의 일을 끝내고 귀국했다. 그 후로 유석은 야당이던 한민당 일에 매달려 이 박사와는 뜸하게 지냈다.
그러다 6·25전쟁 속에서 이 박사는 야당인 유석을 내무장관에 기용했다.
유석은 전쟁초기 야인으로서도 눈부신 활약을 했다. 「무초」주한미대사 및 미군 사고문단장성들과 접촉, 미군의 참전을 역설하고 피난을 가면서 한민당과 국민회·한청·부인회 등 각 사회단체를 묶은 구국총력연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아 후방의 민심안정과 청년들의 지원입당을 권하는 의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 박사는 피난지 대구에서 당시 총리서리이자 국방장관인 신성모씨를 통해 유석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그해 7월 유석은 대전에서 신 국방으로부터 이 박사가 부른다는 연락을 받고 14일 대구로 내려가 이 박사를 만났다. 이 자리서 이 박사는 『언젠가 말했던 대로 내무를 맡으라』고 해서 그 자리서 발령했다.
유석의 내무기용에 대해 다른 국무원들은 별로 탐탁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전쟁 속의 내각에선 국방과 내무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음에도 내무인 조 박사와 신 국방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유석은 경찰의 재 정비작업에 착수하면서 갑 국방의 경제와 방해로 국방부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되자 군정 당시부터 친면이 있던 미군장성에 직접 교섭을 했다.
유석은 미8군사령부의 앨른 소장과 절충, 무기와 차량·휘발유 등 경찰의 무장을 보급 받았다.
유석은 경찰정비에서 더 나아가 학생 발용 경찰대도 조직, 무장하고 나중에 유엔군중대 단위마다 경찰파견대를 배속시켜 피난민을 가장해서 유엔군의 보급노무자로 접근하려는 오열을 색출하는 등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대구주변의 전투가 급박해지자 정부는 유엔군의 작전지시에 따라 부산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내무부만은 유석이 원커, 유엔군 사령관을 설득, 대구에 남아 대구사수에 공헌했던 일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급박하던 대구전세가 다소 풀리고 아군이 영천을 탈환하자 이 박사는 대구 근교의 전선시찰에 나섰다. 이 시찰에는 총리서리인 신 국방도 수행했으나 이 박사는 마중 나온 유석을 그의 승용차에 동승케 해서 전황과 앞으로의 유엔군 작전계획도 묻는 등 국방과 내무의 위치가 바뀐 느낌이었다.
사실 그 무렵의 전화이나 작전계획은 부산에 있던 신 국방보다 유엔군 사령부와 매일 접촉하고 유엔군 장성들과 전선시찰을 하고있던 조 내무가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내무부의 독주가 신 국방에겐 아주 못마땅했던지 부산 임시 관저서 이 박사를 만날 때마다 대구의 조 내무에 대한 모략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유석은 내무장관시절 이 박사를 극진히 모셨다. 전쟁중 이 박사가 전신시찰을 위해 대구에 온다는 기별만 있으면 시외근교까지 나가 마중해서 모셨다. 대구에 머무르는 동안 숙고·식사의 메뉴까지 조 내무가 직접 어떻게 하라고 이르는 등 유석답지 않게 세심했다.
그런 유석도 이 박사에게 엉뚱한 주의를 들어야 했다.
이 박사의 말은 조 박사는 『술을 좀 삼가라』든가 『내무부 예산낭비가 많다는데 사실인가』라느니 『경찰의 대민 자세나 치안질서 확립에 부작용이 많다더라』는 것 등이었다.
유석은 처음엔 이박사의 이런 주의에 간단히 해명을 했다. 그러나 갈수록 모략이 많아 내무부의 일은 대통령의 표시가 잘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유석이 이 박사를 만나야만 허가를 얻을 수 있어 유석은 자주 부산 임시 관저로 가야했다.
임시관저를 다녀온 유석은 그때마다 이 박사를 싸고도는 측근들이 시국도 모르고 하는 일도 없이 모략과 아첨으로 날을 보내고 있다고 개탄했다.
특히 신 국방을 아주 미워해 『내가 부산에만 있으면 그 쥐새끼 같은게 백명이 있어도 모략엔 끄떡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없는 동안에 엄청난 거짓말들을 해 놓는단 말이야. 그 사람들이나 그걸 곧이 듣는 그 분이나 참 걱정이야』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가 일쑤였다. <계속> 【곽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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