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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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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대 교수
한국이사협회 회장
전 POSCO 이사회 의장

#1. A씨는 최근 주위의 부러움을 받는다. 은퇴 후 모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선임돼 상당 수준의 보수를 받게 돼서다. 그런데 솔직히 사외이사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대학 다닐 때 배운 적도 없고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일 년에 몇 번 이사회에 참석해서 점잖게 있다 나오면 되는지 좀 난감하다. 뽑아준 오너가 고맙고 기왕이면 연임도 하고 싶고.

 #2. 업무집행 임원 B씨는 요즘 짜증나는 일이 생겼다. 최근 선임된 사외이사 한 분이 회사의 주요 내부 정보가 담긴 자료를 요청해서다. 사외이사는 말 그대로 회사 밖에서 온 분이고 비상임 이사로서 회사에서 근무하지도 않는데 자꾸 회사 기밀과 관련될 수도 있는 정보를 달라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대충 겉모습만 볼 수 있는 자료를 전달하곤 있는데 어디까지 제공해야 할지 당최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고 회사에서도 알려주지 않고 답답할 뿐이다. 속 안 썩이는 사외이사도 있지만, 그냥 점잖게 있다가 말 한마디 안 하시고 가는 모습을 보면 회사 인건비를 축내는 것 같아 씁쓸하다.

 #3. 정부관료 출신 C씨는 요즘 KT나 POSCO 등 민영화된 과거 공기업 이사회에 불만이 많다. 소위 주인 없는 민영화로 탄생한 이런 기업들은 전문경영인체제로 운영되는데 최고경영자(CEO)와 친분이 있는 사외이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해 자기들끼리 계속 서로 연임시키면서 마치 재단 운영하듯 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 그동안 정부 특혜를 받아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며 커왔던 기업들인데 이제 정부보고 손을 떼라고? CEO의 업적과 무관하게 임기를 채워야 한다고? CEO는 대충 3~4년 정도 하면 만족해야지, 주인도 아닌데 무슨 욕심이 그리 많지? 역시 주인을 찾아줘야 할 것 같아. 수익률은 저조해도 국민연금이 이런 기업들에 대한 투자지분을 계속 상당 부분 유지해야 정부가 감독할 수 있지 않을까?

 #4. 대학총장 D씨는 요즘 기금 모집에 정신이 없다. 대기업 오너 리스트를 작성해 다양한 접촉 방법을 모색 중이다. 오너만 설득하면 300억원 상당의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그런 안건은 이사회를 통과해야 하고 사외이사들의 반대로 보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한다.

 #5. 청와대는 정기적으로 대기업 총수들을 초청해 투자계획과 규모를 발표하게 한다. 이사회를 통과하지도 않은 투자계획을 발표한다? 총수가 결정하면 이사회는 당연히 통과시킬 거란 생각을 정부도 하나?

 #6. 주주 E씨는 본인이 투자한 돈이 기업가치 증대를 위해 쓰이는지 그 기업을 지배하는 일부 소수계층의 사익 추구에 사용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주주총회에서 선임한 사외이사들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지만 사외이사들이 거수기 노릇만 한다는 말만 들을 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금을 빨리 회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저축은행·동양그룹 사태를 보면서 더욱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도 마찬가지겠지? 잘못하면 그들이 한국 주식시장을 다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업지배구조·이사회·사외이사 등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 관련된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챙기느라 지배구조를 무시하고 투자자에게 미치는 부정적 효과도 고려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날 갑자기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시장을 썰물처럼 다 빠져나가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까? 그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시나리오다. 차라리 그 전에 제 역할을 못 한 사외이사들이 민사상, 아니 심지어는 형사상 책임을 물어 구속되고 재산이 압류되는 사례가 나오기를 바란다. 페널티가 존재해야만 법과 제도는 작동되는 법이니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대 교수
한국이사협회 회장
전 POSCO 이사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