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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유격전(14)|옹진학도대(2)|창린도서 백병전 적 백20명 생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옹진학도 유격대는 10여명 단위의 공작대를 통해 귀순공작과 산발적이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한편 때로는 전대원이 출동해 적과 대대규모의 정규전투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 순수한 학생들의 용맹은 가히 다른 유격부대에 시범이 될만했으며 특히 이 옹진학도유격대장은 전투지휘중 중상을 입고 전사할 뻔했다.
이런 일은 20여 서해안 유격부대 중 옹진학도대에서만 있었다.
거의 학생으로만 조직된 옹진학도 유격대는 휴전조인 때까지 옹진반도연안의 13개 도서를 사수하는 큰 전공을 남겼다.
▲장하상씨 (당시 옹진학도대 제2대대장·예비역대위·현 사업·49) <나는 해군 창설 때 입대했다가 나와 늘 학생들과 같이 어울려 다녔어요.
우리 옹진학도대는 50년12월말부터 구월산 공비와 괴뢰군 26여단의 공격을 받고 소강·사곶·부포 등의 포구로 후퇴해 공방전을 벌이다 역부족으로 용호·창린도 등으로 후퇴했습니다.

<2개 면을 10여일간 수복 통치>
동키 제11연대가 된 후인 51년5월8일 기습 상륙전을 벌여 교정면과 서면을 10여일간 점령하고 행정을 실시하다 나왔어요. 각 지대에서 차출된 정예대원 1백50여명으로 특공대를 편성, 5월7일 밤 마합도를 출발해 묵제포로 상륙했습니다.
교정면 내무서원 1개 소대를 기습섬멸하고 괴뢰군 소대병력을 격퇴한 후 각 기관을 점령, 태극기를 게양하고 분주소 사이렌들을 울려 면민을 집결시켰어요.
군중 대회를 마치고 송림분주소를 습격해 구금돼 있는 반공 청년 80여명을 구출해 냈구요.
이어 요새지인 국사봉을 점령하고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해 놨읍니다.
우리는 대병력을 가장하기 위해 범선20여 척을 나루에 대놓고 마합도 지대로 하여금 작전을 벌이게 했더니 적은 우리의 양동 작전에 완전히 말려들어 감히 반격할 엄두도 못 내더군요.
그러나 14일 장연쪽에서 내려온 괴뢰군 1개 대대의 공격을 받아 7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해 나왔어요. 분통이 터져 정보원을 들여보내 적정을 알아봤더니 괴뢰군은 우리의 기습을 두려워해 1대 소대만 남고 주력은 그날 밤으로 후퇴해 버렸더군요. 이래서 우리는 병력을 보강해 16일 다시 상륙했습니다. 18일 내륙으로 들어가 있던 적 중대병력의 공격을 받고 백병전을 벌인 후 실탄이 떨어져 철수하고 말았어요.
양차에 걸친 상륙에서 1백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1천7백 명의 피난민을 구출해 냈으나 우리측도 안인기 중대장외 90명이 전사, 배동윤 중대장을 비롯한 20여 명이 포로가 됐고 신중철 대원 등 20여명이 부상을 했었어요.
18일의 전투 중 이진학 대장은 자폭하려고 폭발물을 가지러 가다 바다로 떨어져 수영을 해 나와 살았어요.
탄알이 다 떨어졌던 30여명의 대원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4시간 동안을 헤엄쳐 발동선으로 돌아 왔어요.
적에 잡혔던 대원들은 끌려가다가 곰재에서 아군 공습의 틈을 타 모두 도주해 나왔습니다.>
▲김일수씨(당시 옹진학도 작전관·현 유신실업전무·42) <우리 주도파견대에서는 51년5월 적전해안에 추락한 영연방공군 조종사 2명을 김두수(현 대구지검 영덕지청장)·김현철 동지 등 9명의 특공대가 들어가 구출해 왔어요. 52년6월24일 밤 1백30명의 정예대원이 옹진군 흥미면 안악리에 기습 상륙해 포진지를 구축중인 괴뢰군23여단 1개 대대를 섬멸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2개 선단으로 나눠 상륙한 후 남북으로 협공해 들어갔어요.
대대본부 백m까지 접근해서 보니 동초가 버리고 간 담배꽁초에 아직 불이 빨갛게 붙어 있읍니다.
우리는 능선을 따라 포위망을 구축한 후 적들이 본부마당에 집합해 조회를 시작하는 순간 박격포 조명탄을 신호로 일제사격을 가했어요.
괴뢰군들은 총한방 못쏴 보고 모조리 넘어지는데 정말 신납디다.
20분간 사격을 해댄 후 장하상 대대의 특공대가 적진을 뚫고 적 대대본부로 들어가 부상자 84명을 생포했어요.
우리 대원들은 앞을 다투어 뛰어내러 죽은 괴뢰군들의 상해농구화를 벗겨 신느라고 야단들이었읍니다.

<4시간 헤엄쳐 살아난 대원도>
나는 84명의 포로를 인솔해 등산곶으로 나오다 적1개소대의 기습을 받아 왼팔에 부상을 당하고 말았어요.
적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압송되던 포로들도 거의 사살되고 말았지요.
마침 미군 전투기들의 공습이 시작돼 적들은 도망쳐 버렸어요.
나는 여기서 낙오가 돼 개구리·올챙이 등을 잡아먹으며 방황하다 4일만에 적지를 탈출해 나왔습니다.
우리 호송대원 중 현덕천 동지가 적탄을 맞아 전사했고 유영근 대원 등 10여명은 아군 기총의 오탄을 맞아 전사했어요.
김응만 동지는 복부관통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탈출해 나왔구요.
미군 공습이 1분만 늦었어도 우리는 전멸했을 거예요.
우리 주력부대는 25일 낮 10시에 철수했는데 그후 알아보니 우리한테 기습당했던 적 23여단 이창화 대대는 편제에서 아주 없어져버리고 말았읍니다.
원래 이 작전은 E여고생이었다 강제로 끌려나온 적 이창화 대대의 위생지도원을 구출하려다 실패해서 벌인 겁니다.
우리 공작대원이 기미를 알았는지 대대장을 여단본부로 전출시키고 이창화를 내보냈어요.
그래서 우리는 화풀이로 쳐부수려고 작전계획을 세우는데 마침 6월22일에는 그 부대에서 위생지도병 한명이 귀순해와 정확한 정보까지 얻고 작전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실탄 등 낙하산으로 공급받아>
▲신중근씨(당시 옹진학도대 제3대대장·예비역대위·현 사업·42) <우리 주력이 천장산으로 작전을 하려 들어간 사이에 창린도가 52년7월14일 적26여단의 증강된 특공대대의 공격을 받아 실함 됐읍니다.
적 창린도 특공대 4백80여명은 평안남도 수안군에서 3개월간 상륙훈련을 받은 후 황해도 송화 여단본부에 있다가 공병1개 중대 포병3개 중대의 엄호아래 군관 13명의 지휘로 기습해 왔어요.
84%가 노동당원 출신이었던 괴뢰군 특공대는 2백여리나 떨어진 송화에서 출발해 왔으니 우리는 전혀 정보도 모르고 있었어요.
창린도 방위를 맡았던 제1대대는 적의 기습을 받고 정덕준 박성근 대원 등 20명이 포로가 되고, 목영우 대장이 본부인원 60여명을 데리고 가까스로 어화도로 철수했어요.
7월16일 우리는 순위도를 방어 중인 제2대대가 주력이 돼 특공대를 편성하고 적 수중에 들어가 있는 창린도의 탈환전을 벌였습니다.
영 연방 기함 아비우스4를 비롯한 14척의 대소군함과 연40대의 함재기 지원을 받으며 새벽에 적전 상륙을 감행했어요.
실탄과 수류탄을 낙하산투하로 보급 받으며 하루종일 백병전을 벌여 창린도를 완전 점령했습니다.
헤엄쳐 나가는 것까지 모조리 쏴 죽여 섬 안에 남아 있던 적은 문자 그대로 섬멸시켜 버렸어요.
1백80명을 사살, 군사부대대장 등 1백20명을 생포했고 권총13정을 비롯, 각종 화기 3백여정을 노획했지요.
아군측 피해는 미군 테너 상사 등 부상자 9명뿐이었어요.>
▲이진학씨(당시 옹진학도대대장·예비역대위 현 중앙공무원교육원교수·48) <53년6월25일 동키 사령부로부터 철수명령이 내려 우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옹진반도연안의 부대기지들을 떠나 대청도로 올라갔어요.
7월 중순께 사령부서는 휴전이 연기됐으니 다시 우리 부대는 어화도로 나가라고 합디다.
나는 미 고문관과 선발대원들을 데리고 나가있다 7월21일 괴뢰군 1개 중대의 기습을 받고 전사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이날 우리 부대 고문관 페니 중위 등 우리 대원 20여명이 전사했어요.
나는 3시간 동안의 혼전 끝에 적탄을 맞고 페니 중위 옆에 쓰러져 버렸는데 괴뢰군이 오더니 다시 머리에다 대고 따발총을 갈기고 옷과 신발을 다 벗겨 갔어요.
그런데 다행히 총탄은 목과 팔 등에만 맞고 빗나가 버렸어요.

<우리 대원 모두 4백여명 희생>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다가 우리 대원들에 의해 구출됐습니다.
우리 옹진학도 유격대는 전체적으로 볼 때 전과보다는 희생이 컸는지도 모르지만 그 의열 정신만은 오늘의 학생들에게 자랑하고 싶습니다.
3년 동안의 게릴라전을 통해 적1천여 명을 사살, 3백60여명을 생포하거나 귀순시켰고, 6백여정의 각종 화기를 노획했지만 우리 대원 4백여 명이 희생되는 비싼 댓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들 전사자 중 1백27명은 당국의 확인을 받아 연금 혜택을 받고 있지만 나머지 무명의 대원들은 영령조차 의지할 곳 없이 헤매고 있는 형편입니다.>
주요일지(1951년12월31일∼52년1월1, 2, 3일)
※12월31일▲고랑포 서방서 격전 ▲처칠 수상, 방미 출발
※1월1일▲유엔군, 전전선서 새해 포격 ▲서남지구 공비소탕전 큰 성과 ▲휴전회담 무진전 ▲스탈린, 공동통신을 통해 일본 국민에 신년 메시지
※1월2일▲전 전선소강상태 ▲밴덴버그 미공군 참모총장, 공군력 강화 역설
※1월3일▲문등리 서방서 아군 후퇴 ▲미국무성, 스탈린이 대 일본 국민 메시지 발송을 비난 ▲수에즈 연하정세 긴박. 애급 경찰, 영국과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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