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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 <제자 윤석오>|<제26화> 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 (120)|임영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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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돈암장>
이 박사의 돈암장 생활도 탁치 반대 운동·독립 촉성 국민회 구성 등 일로 눈들 새 없이 바쁜 생활이었다.
나는 비서일과 식사·의복 시중까지 세세한 것을 도맡았다. 심지어 해방 전에 친일해서 돈을 번 재벌들이 나를 통해 이 박사에 전해 달라고 정치 자금을 가져오면 이것도 받아 전달했다.
이름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P씨·K씨·S씨 같은 이는 그 무렵 자주 찻아 오던 재벌들로 기억에 남아 있다. 어떻든 나는 돈암장에서 나의 온 정력을 기울여 아버지 같기도 하고 남편 같기도 하고 오빠 같기도 한 이 박사를 위해 기꺼이 헌신했다.
이 무렵 어느날 이 박사는 얘기 끝에 『「루이스」란 미국 유학 시절 주임 교수가 지어 준 나의 이름이다)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지? 하지만 여자 혼자서 세상을 살기는 힘든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옛날에도 선생님께 말씀드렸읍니다만 이젠 제나라를 찾았으니 학교에 돌아가 젊은이들과 일생을 같이하겠읍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 박사는 『장한 일이야. 우리 젊은이들은 이제부터 배워야 하는게야』라고 말하며 칭찬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부 일까지 도맡은 나의 보필을 두고 항간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시중의 이런 소문이 워싱턴에 있던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전해졌던지 한번은 「프란체스카」가 『당신이 나의 남편을 도와주시는 일에 매우 감사를 드리지만 내가 서울로 가니 집으로 돌아가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하루 속히 한국에 와서 이 박사를 도와 달라』고 담담하게 답장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뒤 「프란체스카」 여사가 갑작스레 돌아왔다. 뒤에 안 일이지만 누군가가 항간의 소문을 편지로 전해 「프란체스카」 여사는 화가 나서 부랴부랴 온 모양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이 박사가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고 또 「프란체스카」 여사가 처음으로 한국에 왔으니 모든 것이 서툴러 아직은 돌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엌에 나가 식사 준비도 감독하는 등 종래 하던 대로의 일을 계속했다. 며칠간 아무 일 없이 잘 지냈는데 어느날 아침 회의에 참석키 위해 외출하려는 이 박사에게 두루마기를 입혀주다가 「프란체스카」 여사가 보고 『이젠 그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면박을 해 말다툼을 하게 됐다.
이 박사가 이런 자리를 잘 중재해 주었지만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이 박사 곁을 떠났다.
후에 「프란체스카」 여사의 오해가 H씨의 모략 때문인 것을 알고 어느 좌석에서 『남자가 체통도 지키지 못한다』고 하면서 뺨을 때려준 일이 기억난다.
국내 정국은 좌우로 갈라지고 미·소 공동 위원회도 결렬되어 정국은 더욱 혼란해져 갔다. 나는 이 박사의 지시로 도미했다.
1946년10월 나는 친분이 있던 「마셜」 미 국무장관에게 쫓아다닌 끝에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겠다는 우리 목표를 일단 달성했다. 그러자 민주의원 의장이던 이 박사는 나를 「유엔」 특사로 지명해왔다.
그러나 점령군 사령부와 민주 의원에선 나를 한국 특사로 인정해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 박사가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긴 것만이 감격스러워 눈물이 앞섰다.
나의 사재를 털어 10만 「달러」를 갖고 20일만에 뉴요크에 도착하여 「유엔」 본관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패스포트」가 없어 회의장에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서울에 급히 연락하여 신문 기자증을 공수해 와 본 회의장에 출입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12월 중순께 한국의 특명 전권 대사로서 이 박사가 건너와 나는 지금까지 미·소·중국·인도·「필리핀」 등 각국 대표들과 접촉한 경과를 일일이 이 박사에게 설명했다.
이 박사와 나는 워싱턴에서 「하지」 중장을 만났다. 「하지」는 이 박사에게 『한국은 미국에 대해 너무 강력히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말라』고 했으나 이 박사는 『북한에선 실질적으로 괴뢰 정부가 소련인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데 남한에서는 진실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허용하지 않는 미군정의 부당성에 대해선 보다 강력히 그것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후 나는 임병직씨와 피로도 잊고 각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노력한 끝에 11월14일 새벽 2시 반 한국 정부 수립 안이 가결되었다. 나와 임씨는 다른 나라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남한만의 선거로 이 박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초대 내각의 구성이 착수됐다.
이때까지도 나는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미국에 있을 동안 중앙여대가 재정난으로 곤경에 빠졌다는 편지도 받았지만 이 박사의 귀국 지시를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8월2일 아침 이 박사로부터 이제는 귀국하라는 전보를 받고 지체없이 독립된 이 나라로 서둘러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리니까 수천명의 환영 군중이 나와 반겨 주었는데 기자들이 몰려들며 대뜸 나의 입각설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전연 이 문제엔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모른다고만 하고 곧바로 이화장으로 가서 이 박사를 뵈었다.
나는 이 박사에 의해 초대 상공장관으로 기용됐다. 내가 장관이 된 다음날인가 이 박사와 점심을 함께 하게 됐는데 이 박사는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의 미국의 태도가 걱정된다』면서 북괴의 남침을 우려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군이 철수한다고 해도 유사시엔 한국을 도와 줄 것』이라고 대답했던 일이 기억난다.
내가 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여자 국민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것도 순전히 이 박사를 도우려는 마음에서였다. 4·10가 일어난 며칠 후 밤중에 경무대로 들어오라는 이 박사의 전갈이 왔다. 이 박사를 만난 나는 무조건 하야하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루이서 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잘못이야』하면서 분명히 하야할 뜻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 박사가 하야한 뒤 나는 그분을 가까이 뵐 길이 없었다. 다만 항간에서 이 박사의 재산 도피설들이 떠돌 때 난 정말 슬픈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기론 이 박사 이름으로 남겨진 재산은 마지막 독립 운동의 산실이던 이화장 하나 뿐이었다. 이젠 그것이 증명되어 요즘 세태와 견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청렴했던 분임을 뚜렷이 회상할 수가 있다.

<계속>
※ (임영신씨의 글은 2회로 끝내고 다음은 공보처장을 지낸 이철원씨의 글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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