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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Y부대(7)|「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유격대(7)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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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부분의 Y부대 지상유격부대들이 분산 월동 중 적의 추격에 참패하고 말았으나 함경북도 설령지구에 들어갔던 관모봉부대는 무사히 월동을 마치고 52년 봄 춘계작전을 벌였다.
붉은 피로 설원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결사 항전하다 쓰러져간 수많은 무명의 유격용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도 Y부대의 잔류대원들은 계속 용감히 싸웠다.
▲조광진씨(구명 기묵·당시 Y부대원·현 건화산업 사장·53) <월동을 마친 우리 관모봉부대는 52년3월 춘계작전을 위해 정찰대 8명이 처음으로 기지주위를 수색했습니다. 산에서 부락으로 통하는 길가에는 유격대원들에 보내는 북괴 귀순 권고문이 곳곳에 붙어있읍디다.< p>

<연원 8명이 적 1개 소대 섬멸>
3월21일 내가 대장이 돼 허경훈·허영철 동지 등 10여명이 청진지구 파견대로 출동했어요. 우리 청진지구파견대의 작전목표는 오황산에 도피중인 2백 여명의 반공청년들을 접선해 포섭한 후 청진에 주둔 중인 괴뢰군 8여단을 기습하는 거였어요. 나는 51년 겨울에도 여러번 청진에 잠입해 6·25전부터 반공투쟁을 같이했던 북한연맹동지들을 접선해 공작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어요.
우리는 도중 함북 경성군 주을읍으로 지하공작을 하러 내려가다 주을 서북방 40호쯤 되는 해면부락서 우리 유격대를 토벌 나오는 30여명의 내무서원과 조우전을 벌여 전멸시켰어요.
이튿날 건너마을로 들어가 한 민가를 덮쳐 주을읍 사회안전부원인 나희백이란 자를 생포했어요.
다음날 나와 도중서 포섭한 박이란 청년을 식량을 구해오라고 마을로 보냈더니 나가 내무서로 가서 밀고를 해버렸어요.
우리는 여기서 식량도 없고 눈에 쌓인 길도 안 뚫려 관모봉 본부로 돌아왔어요. 5월 중순 함북 무산군 연사면에 주둔중인 괴뢰군 기동소대를 기습키로 하고 허영철 동지 지휘로 8명의 대원이 출동했어요.
목적지에 도착해 수색전을 벌이다 도로 변에서 노력 동원 나온 민간인 3백 여명을 발견했어요.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 이들을 모두 손을 들게 한 후 집합시켜 허 동지가 선무강연을 했어요.3백 여명 중에서 10명의 공산당원을 잡아냈읍니다. 40세좀 되는 한 장년에게 당원증을 내라고 했더니 안주머니를 뒤지는척하다가 갑자기 단검을 꺼내 이양신(실종) 동지한테 들이대며 달려듭디다.
이양신 동지는 그 자한테 손바닥을 찔렸어요. 당원 10명을 처치하려는데 괴뢰군 30여명이 도로로 행군을 해옵디다. 우리는 각자 가진 수류탄을 뽑아 던졌어요. 맨앞에 오던 5명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나머지는 엎드립디다. 우리는 BAR를 비롯, 소총들로 일제사격을 가했어요. 적은 15명쯤 사살됐고, 나머지는 도망쳐 버렸어요. 20분후엔 잔적들이 다시 공격을 해옵디다. 목재더미 뒤에 숨었던 우리대원들은 적을 50m까지 유인한 후 일제 사격을 데 가해 전멸시켜 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적 기동대 1개 소대를 전멸시킨 후 우리 대원들은 전원 무사히 본부로 돌아왔어요.
주을서 되돌아온 우리 청진파견대는 5월20일 제2차 출동을 해 1주일만에 청진시 수성 동북방에 도착했어요. 우리는 부령군 석막에「아지트」를 정했어요.
나는 괴뢰군 복장으로 시내를 활보하면서 공작을 시작했습니다. 과거 북한연맹서 같이 반공투쟁을 했던 지하에 숨어있는 동지들을 속속 접선했어요.
나는 당시 함북도당 후생사업부장이던 신모씨와 청진시 유지인 김모 영감을 완전히 포섭했어요.
신씨의 주선으로 북괴최고검찰청장의 아버지이며 공산당 유지인 엄모씨와 공산당 거물인 이주봉을 접선해 포섭하는데까지 성공했읍니다. 나는 이주봉을 통해 공산당 고위간부들을 포섭할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아주 협조적이던 이들이 휴전회담이 진전돼 정전이 확실시되자 모두 돌아서 버립디다.
나는 안타까와 몸부림을 쳤어요. 도저히 이들을 이용한 공작이 불가능해져 마지막으로 내 인척되는 괴뢰군 대좌를 최후적으로 접선했어요. 그는 아주 새빨간 공산당이었어요. 물론 괴뢰군 대좌 정도로 내가 계획한 공작을 수행할 수는 없었지만 떨어져 나간 이주봉 등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지요.

<적과 접선했다고 전기심문도>
며칠 후 약속했던 지점서 그 괴뢰군 대좌를 다시 만났는데 서로를 의심하고 권총까지 빼들었어요.
나는 그에게 월남하자고 무한히 설득했으나 실패했어요.
나는 석막역이 폭파되거든 내가 월남한줄 알라는 얘기를 남기고 인척되는 괴뢰군 대좌와 헤어지고 말았어요.
6월말 이시영 동지가 새벽에 소변을 나갔다 우리「아지트」를 향해 올라오는 적을 발견했읍니다.
이 동지의「적이다!」라는 고함소리에 모두들 뛰어나가다 임창용(전사) 동지는 적탄을 맞고 쓰러져 버렸어요.
나는 이날부터 나머지 대원들을 데리고 귀환할 결심을 하고 한·소 국경지대인 두만강하구의 서수나로 나갔어요.
우리는 10여일만에 서수나에 도착,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배를 납치해 탈출해 나왔읍니다.
나는 귀환한 후에도 이북서 괴뢰군 장교와 만났다는 사실 때문에 전기심리탐지기로 심사를 받기까지 했어요.
후에 JACK의 미 고문관들은 내가 결백했다는 걸 알고 돈을 몇 부대 실어다 놓고 사과했어요.
나는 돈은 절대 안받겠다고 거절했어요. 지금 한국전쟁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국제적인 전쟁인데 한국청년의 한 사람으로 민주 대열서 당신들과 같이 싸웠는데 무슨 보상이냐고 냉정히 거절했어요.
이 얘기가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윤치영씨한테 들어가 많은 칭찬을 받았어요.>

<포로된 미군 못 구해 전전긍긍>
▲전택임(당시 Y부대원·현 사업·45) <52년5윌23일 나는 김운태(구명 영춘)·김남순·허영철·허경훈·유득규(실종) 동지 등과 위석훈(전사) 사령관의 명에 의해 길주·성진으로 파견됐읍니다.
우리는 가는 도중 산간 민가를 기습해고 마을의 세포위원장을 생포했어요.
우리는 세포위원장한데서 백무선(백암∼무산) 철도를 폭격하다 추락한 미군조종사 2명이 포로가 돼 아랫마을에 와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는 억류중인 미군포로를 구출하겠다면서 세포위원장을 앞세우고 아랫마을로 내려갔어요. 동행하던 세포위원장이 내일 회의에 나갈 서류를 가져오겠다고 뺑소니쳐 포로구출계획은 포기하고 말았어요.
우리는 목적지인 함북 길주군 덕산면에 도착해 변장을 하고 마을로 들어갔읍니다.
한 민가서 40세 가량의 남자가 나오더니 증명을 보자고 합디다.
사회안전부원을 가장해도 안들어 먹고 아랫마을 인민위원장한테로 가자는 거예요.
가다가 해치울 생각으로 함께 내려가는데 마침 인민위원장이란 자가 올라옵디다.
나는「잠바」속서 권총을 꺼내 두 사람 가슴에 한발씩 쏴버렸어요.
우리는 도중서 낙오한 유득규 동지가 만약 적에 잡혔다면 도저히 길주·성진 지역서 활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관모봉 본부로 되돌아갔읍니다.
6월초 내가 본부 동초를 서는데 뜻밖에도 유득규 동지가 찾아왔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너 괴뢰군을 데리고 왔지 않느냐고 윽박질렀더니 유 동지는 자기를 살려준 DALD소속 아군 첩보대원 2명을 데리고 왔다면서 강 사령관실로 들어갑디다.
대장이란 자가 강 사령관에게 부대를 합치자는 제의를 했어요.
강 사령관은 무전사와 김모 동지를 동행시켜 1주일 후 DALD대원들을 모두 인솔해 오기로 하고 출발시켰으나 끝내 종무소식이었어요.
6월20일쯤부터 성진·주을·풍산·무산쪽에서 괴뢰군 2개 사단이 우릴 포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어오기 시작합디다.
6월24일 밤 우리 기지의 사방에서 적의 불빛 신호가 오릅디다.
포위된게 틀림없더군요. 25일 아침 우리는 짐을 꾸려 가지고 활기봉으로 이동 행군을 시작했어요.

<적 기습받고 최후의 항전 벌여>
이동 중 길혜선(길주∼혜산) 연변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이시영(전사) 작전참모가 중상을 입고 절벽으로 굴러 떨어진 대원 9명은 산으로 들어갔어요.
강석훈 사령관도 이때 절벽서 떨어져 중상을 하고 심한 출혈을 했어요. 적의 기습에서 탈출한 강 사령관·나·최윤병·김양봉·김운태·허영백·허경훈 동지 등 12명은 활기봉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성진 앞 바다로 나와 영도본부로 돌아가기로 했읍니다.
이튿날까지 우리가 기습을 당했던 장소에선 남은 대원들이 최후의 한발까지 쏴대는 결사항전의 총소리가 들립디다.
이 기습에서 이시영 동지가 전사했고 5명이 실종됐어요.
우리 12명은 마천령을 넘다 또 적의 기습을 받아 강 사령관과 이양신 동지가 전사하고 유득규 동지가 실종됐어요.
남은 우리 9명은 김운태 동지의 후배를 만나 해안까지 길을 안내 받고 나왔어요. 마침 미 해군 함포사격이 시작돼 성진 시가가 불바다인 틈을 타서 배를 한척 끌어내 타고 탈출하는데 성공했읍니다.>
◇주요일지(1951년12월4·5·6일)
※12월4일 ▲지상전투 평온 ▲B-29 의주비행장 폭격
※12일5일 ▲이 대통령·지리산 공비 토벌 협조 요망 방송
※12월6일 ▲휴전회담합동분위「유엔」대표, 휴전감시에 대한 8개항 신 제안 제시 ▲「러스크」미 국무차관 사표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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