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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Y부대(3)유격전(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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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작대원들의 거점확보가 끝난 후 투입된 전투대원들은 51년9월초부터 각부대별로 본격적인 작전을 전개했다.
정규 괴뢰군부대와의 전투는 물론 중요한 군사시설들을 기습 파괴하고 부락을 기습해 당 간부들을 납치해 오는 등 목적한 유격활동을 착착 진행해 갔다.
결사를 각오한 무명의 Y부대유격용사들은 깊숙한 적의 후방을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 땅으로 알고 용감히 싸웠다.
현지에서 포섭한 수많은 대원들도 본 대원들과 함께 작전에 참여했다.
육상부대의 치열한 작전과 더불어 해안선일대에서도 해상대가 맹렬한 단기작전으로 보급로 등을 파괴하며 적 후방을 교란시키자 당황한 적은 매일같이 각종 위원회를 소집, 한파부대의 「산돼지」들과 「물쥐」들을 잡으라고 볶아댔다.
북괴는 또한 정규군은 물론 12∼13세의 국민학교 학생까지 동원해가며 Y부대의 토벌에 안간힘을 썼다.
당시 북괴에서는 Y부대를 한철민 대장의 호를 따 한파부대라고 불렀고 육상대원들과 해상대원들을 암호 겸 별명으로 「산돼지」와 「물쥐」라고 불렀다.

<대원들 연고지별로 지하조직>
이제부터 적지 깊숙이 들어가 전투를 벌였던 대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김후석씨(당시 Y부 대원·현 사업·45)<나는 1.4후퇴 때 남하해 피란 생활을 하다 51년7월19일 y부대에 입대했습니다. 한달 동안 소기의 훈련을 마치고 8월23일 강형락(전사) 소대장을 비롯한 14명의 대원동지들과 같이 부산수영비행장을 이륙했어요.
새까만 「페인트」칠을 한 쌍발 수송기는 38선을 넘으면서 조명등을 끄고 깜깜한 칠흑의 북한 땅을 날아갑디다. 목적지점에 갔으나 안개 때문에 투하할 수 없어 다시 부산으로 내려 왔어요.
다음날 밤에야 우리는 목적지점에 모두 무사히 낙하산을 타고 내렸습니다.
마중 나온 동지들의 인도를 받아 우거진 밀림 속에 있는 본부로 들어갔어요.
도착신고를 했더니 최제부 사령관은 『이제 고향 땅을 딛고선 여러 동지들은 공산당의 마수 속에 신음하고 있는 1천2백만 명의 부모형제자매를 기어코 구출해야한다』는 요지의 훈시를 합디다.
3일 후엔 윤명필(전사)·임중호·조민형 동지를 비롯한 제2진 대원 11명이 도착해 우리부대는 선발대원들과 합쳐 모두 60명이 됐어요.
우리는 우선 대원들의 연고지별로 지방조직을 시작했습니다. 지하에 숨어 반공운동을 하는 청년들과 반동으로 몰려 두문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접선해서 손을 잡았어요. 또 본의는 아니나 죽음을 면하기 위해 세포위원장이나 민청위원장 등을 하고 있는 우익인사들도 완전히 포섭했어요.
활기봉에 거점을 완전 구축한 우리 백호과구 부대는 인근의 단천·갑산·예산·혜산군 일대에 포섭한 현지의 인사들과 함께 세포 망을 철저히 조직했습니다.
지방 조직망 중 독립투사였던 김주형(고인)옹을 비롯한 이승민(자결)·김공성(전사)씨 등과 후에 변절했다. 월남해 살고있는 유일한 현지여자대원이었던 노정숙 여사의 활동은 아주 컸어요.
8월말 김원표(전사)·최원준 두 동지가 괴뢰군대위계급장을 단 갑산군 군사동원부장을 납치해 왔어요. 그자는 모든 정보를 순순히 폭로합디다. 매일 밤 비행기가 와서 돌고 가는 것을 보고 갑산 군과 혜산군 무장 대를 총동원해 활기봉 일대를 수색할 계획이라고 합디다.
우리는 곧 적 무장 대와 전투를 하게될 것을 예상하고 현지서 포섭한 40여명의 대원들을 열심히 훈련시키며 지방조직망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어요.
마침내 지방정보원들로부터 갑산군 진동면 진동리 부락에 내무부서원들이 2백 여명의 무장대원을 데리고 들어와 민가에 분산 수용시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최제부 사령관은 강형락 동지를 비롯한 30여명의 동지들에게 적 무장 대를 기습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디다.

<지휘하던 최제부 사령관 전사>
새벽2시를 기해 부락을 완전포위 한 후 「바주카」포를 신호로 일제사격을 가했어요.
독 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된 적 무장 대는 우리의 선제공격에 한발의 응사도 못한 채 전멸되고 말았어요.
참패를 당한 적은 며칠 후 갑산·혜산군 일대의 핵심당원들을 총집결시켜 사후대책을 논의하는 회의를 엽디다. 회의장소로부터 시간까지 지방정보원으로부터 자세한 연락이 왔어요.
최 사령관은 이 사실을 영도본부에 타전해 미군 기들로 하여금 폭격케 했어요. 회의시간을 정확히 대온 8대의 미군전투기들은 갑산 읍내를 잿더미로 만들어 놔버립디다.
활기봉 거점이 노출돼 관모봉으로 「아지트」를 옮기기로 하고 우리 2백 여명의 대원들은 야음을 이용해 행군을 계속했어요. 9월3일 새벽5시쯤 혜산군 봉두리에 있는 신정수라는 마을을 통과하다 임산 작업 소를 지키는 무장대원들과 일전을 벌이게 됐어요.
우리대원들이 일제사격을 가하며 도망치는 적을 쫓아 부락을 덮쳐 들어가던 중 맨 앞에서 권총을 빼들고 진두 지휘하던 최제부 사령관이 적탄에 가슴과 허벅지를 관통 당하고 쓰러져 버렸어요.
우리는 최 사령관의 시체를 양지바른 골짜기에 묻고 지용수(실종)부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기어이 원수를 갚고 말겠다는 복수심에 이를 악물고 행군을 계속 했어요. 9월4일 밤 우리는 용암리를 기습해 복수전을 벌였습니다.
괴뢰군과 내무서원 14명을 사살하고 부락 세포위원장과 무장자위대대장 및 수명의 열성당원을 생포했어요. 또 임산 작업소, 국영백화점, 기관차 9량, 철도와 교량 3곳을 완전 파괴했습니다.
도망치는 임산 작업 소장은 박모 동지가 박격포로 명중시켜 산산조각을 내버렸어요.
부락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창고 안의 피복을 모두 꺼내다 나눠주면서 선무 공작을 했어요. 이때 한 여선생은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면서 목을 놓아 울어댑디다. 피맺힌 이 여선생의 원한의 통곡을 마음껏 위로해주지도 못한 채 우리는 발길을 재촉하고 말았어요.>

<공민증 보자는 내무서원 사살>
주홍길씨(당시 Y부대대원·현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진흥과장·48)<나는 일본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 51년4월29일 문천 지구공작요원으로 대원 11명과 함께 미 군함 편으로 송전반도를 거쳐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우리 공작대의 임무는 문천·양덕 지역에 투하될 본부가 한달 동안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는 거였어요.
우리는 상륙하자마자 적 보초병과 조우해 총격전을 벌였어요.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다시 해변으로 나가 철수키로 했어요.
나와 원기동지는 이미 육지 깊숙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적을 뚫고 나올 수가 없었어요.
나는 원 동지와 후속부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예정된 산악지대를 향해 계속 들어갔습니다.
이튿날 새벽 고개를 넘다 장총을 멘 내무서원을 만났어요.
공민증을 보자고 합디다. 허리에서 권총을 꺼내 돌아서라고 위협했더니 겁에 질린 내무서원은 선뜻 돌아섭디다. 내가 덮치면서 장총의 노리쇠를 빼려고 하는 순간 그자는 내 권총 쥔 손을 내리칩디다.
나는 원 동지와 힘을 합쳐 내무서원을 넘어뜨리고 권총을 2발 쏴 사살해 버렸어요. 총성이 나자 적은 우리 주위의 산을 완전포위하고 수색 전을 폅디다.
바위 밑에 숨어 있는데 나무를 하러왔다는 40세 가량 되는 한 민간인 남자가 우리한테 접근해 오더군요.
붙잡아서 권총을 가슴에 겨눈 채 꿇어 앉혀놓고 몇 마디 물어보는데 그자는 와락 달려들더니 권총 쥔 내 손을 잡으며 『여기 있다』고 고함을 칩디다.
원동지가 「카빈」으로 쏴 죽여버렸어요. 총소리가 또 나자 국민학교 5∼6학년 짜리 꼬마들 10여명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듭디다.

<거짓정보 대주다 심한 고문>
뒤에는 장총을 멘 청년2명이 달려오더군요. 나는 원 동지와 여기서 서로 갈라져 각기 포위망을 뚫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나는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원 동지는 불행히도 못나왔어요.
나는 풀뿌리와 나뭇잎으로 연명을 하면서 계속 행군을 했어요. 5월11일 밤 산간 외딴집서 잠을 자다 내무서원한테 생포되고 말았어요.
소 밧줄에 묶여 내무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습니다. 5월19일 밤 우리 유격대원이 대량 투하된다는 거짓 정보를 진술했어요.
원산에 있는 강원도 사회안전 부서는 5월19일 밤 투하되는 우리유격대원들을 나가서 잡아오면 날 살려주겠다면서 괴뢰군 대대장이 중국 집에 데리고 가 한턱 대접까지 하면서 나를 회유합디다.
5월19일 밤은 날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괴뢰군들만 내가 얘기한 지점으로 나갑디다. 나는 일차적으로 탈출할 기회를 놓치고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됐어요. 괴뢰군 1백 여명은 19일 밤 허탕을 치고 돌아와 나를 감방에서 끌어내다 죽이겠다고 위협합디다.
나는 틀림없이 내가 잡혔다는 정보가 본부로 들어가 그곳에 투하를 포기한 것 같다고 변명을 했더니 몽둥이로 마구 내리칩디다.
나는 5월26일 반동범죄자들을 평양감옥으로 이송하는 대열 속에서 급기야 탈출하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7월 중순 투하된 본 대의 조모 동지 등을 만나 같이 활동하다 11월7일 해안으로 나와 어선을 탈취해 타고 영도본부로 돌아왔어요.>
주요일지(1951년11월22·23·24일)
※11월22일=휴전회담 제34차 합동분위, 「바클리」미 부통령 내한, 허 총리서리, 대전임시선도 반대 공한 국회제출, 「밴덴버그」미 공군 참모총장, 휴전회담 결렬되면 만주중공군기지폭격 경고
※11월23일=「바클리」미 부통령, 「리지웨이」「밴플리트」와 회담, 연천 서쪽서 백병전, 「리지웨이」, 미군포로 8천명 학살됐다고 「유엔」에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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